“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책 정리를 마치고 나자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는 말은 거짓말이고……. 아아, 지금 시각이 제로 시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 맞다. 제로 시라고 하니 지금이 뭔가 특별한 시간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뻥이지만. 아하하하!

나는 아직도 거리를 헤매 다니고 있었다. 딱히 살자씨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현실도피다.

내 왼손에는 두 권의 책이 들어있는 종이봉투가 붙들려 있었다. 그 중 한 권은 버릴 수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은, 그러나 봐야 하는 책이 있었다. 다른 한 권은 줄곧 읽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반지전쟁 4와 같은 속성의 책인 게 틀림없었다. 맨 뒤에 연필로 쓴 편지가 들어있을 거 같아 무서워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을 읽기가 싫어서 나는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거였다. 걷는 중에는 책을 읽을 수 없으니까, 하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걸으면서 책 잘도 읽는 주제에.

바보짓이란 걸 자각하면서 바보짓을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상당히 스트레스 쌓인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이냐면 어깨가 저릿저릿거린다. 원인은 스트레스 물질의 분비로…….

이게 아냐.

또 다시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며 도피성 사고로 뇌 피질 속을 뉴런들이 질주하고 있다. 우와아, 이러다간 언젠가 미쳐버리고 말 거야.

아니, 이미 난 미친 걸지도 모른다. 사실 자칭여동생 따위는 없었고, 내가 왼손에 들고 있는 종이봉투도 실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17세의 담임선생님? 그런 건 환상인 게 당연하잖아.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당신은?

“오빠!”

그래서 그 목소리가 들린 그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존재할 리 없는 것이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아, 진짜 나는 지금쯤 병실에 누워서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깨어날 수 없는 잠 속에 빠져서. 얼른 병원으로 돌아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가 코마상태로 돌입하기 전에!?

“오빠! 왜 도망치는 거야! 오빠~!”

쫓아오고 있다. 나를 쫓아오고 있다. 실재할 리 없는 것이 나를 쫓아오고 있다. 붙잡히면 정말로 죽어버리고 말 거야. 기묘한 충동에 사로잡혀 나는 속도를 올렸다. 더욱 빠르게 달렸다. 과연 전교에서 달리기로 우승한 기록이 있는 남자! ……이어 달리기였지만!!

“오빠! 오빠아아!!”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거리가 벌어진다. 따라오지 못한다.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발을 멈췄다.

왜냐면, 왜냐면 말이지.

여동생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기 때문이다.

오직 그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귀신같은 형상을 하고 내게 달려오는 여동생의 모습이 있었다. 우와, 계속 도망칠걸. 나는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오빠아아아아아!!”

그런 기합성을 내며, 여동생의 이단옆차기가 내 목 하단에 작렬했다. 목뼈 부러지면 죽는데. 뒤로 날아가며 한 생각은 그거였다.

* * *

“그렇게 저는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 패턴 질리지도 않아?”

“내가 할 말이다. 너는 나를 몇 번이나 패야 질릴 거냐?”

“오빠가 도망가니까 그렇지…….”

여동생이 내민 손을 붙잡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 체중이 더 무거운지라 여동생은 비틀거렸지만, 어떻게든 버티며 나를 끝까지 일으켜주었다.

나를 일으켜주었다.

“내가 화낸 게 그렇게 싫었어?”

“싫었다기보다 무서웠어.”

“우와, 왠지 그 반응에 더 상처받은 나!”

“별로 상처받지 않은 것 같은 반응 고마워.”

“하긴 지금껏 그렇게 팼으니.”

“나는 지금이 제일 무서워.”

그렇게 농담 반, 진담 반(!)의 대화를 나누며, 나는 여동생과 어깨를 나란히 두고 걸었다. 물론 신장 차가 있으니까 완전히 나란히는 아니지만.

나와 닮은, 나보다 작은 소녀.

나는 별 생각 없이 여동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문질러 주었다. 문질문질.

오오, 반항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내 손길을 받으면서도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어지면 전화라도 할 것이지.”

“미안. 미처 생각을 못했네.”

“전화기 내놔.”

나는 무서웠기 때문에 당장 전화기를 여동생에게 내놨다. 여동생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화기를 조작했다.

“자.”

“응? 뭔가 달라진 거야?”

“0번을 누르면 나한테 바로 연결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문자라도 날려.”

“0번이라…….”

그런데 0번이 어디 있는데? 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이 휴대폰, 번호 찍는 버튼이 없는걸. 그냥 터치스크린이다.

“그런데 너한테도 휴대폰 있었어?”

“응. 자.”

여동생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보였다. 아이폰이었다. 나랑 똑같은. 단지 내 것보다 새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예 새 거였다. ……어째서?

“오늘 만들었거든.”

“그러냐…….”

여기서 ‘전화비는 어느 계좌에서 빠져나가는데?’라고 물으면 맞을까? 맞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여동생은 바로 다른 이야기를 재잘대고 있었다.

“그런데 손에 든 짐에 나한테 사준다던 과자는 눈에 안 띄는데, 어디 뒀어?”

우와아, 하필이면 그거냐.

“깜박했어.”

“뭐야아.”

어라, 생각보다 화는 안 내네. 나는 의외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아니, 화 안 내나 싶어서.”

“그야 화났지.”

“어째서?”

나는 두 번째의 질문을 했다. 물론 과자를 사지 않은 건에 대한 건 아니다.

“오늘 집안 청소 말끔히 하고 예쁘게 차려입고 오빠 기다렸는데, 해가 진 다음에나 돌아온 데다 나나 집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도 없었으니까.”

“우와아, 미안. 그랬구나. 잘했어요.”

나는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동생은 새침한 표정으로 나의 손길을 말없이 받았다. 그래서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양손으로 여동생의 머리를 온통 헝클어놓고 말았다.

“꺄아아악! 이 바보가?! 이야아아아아압!!”

로우킥이었다. 고목나무를 일격에 쓰러뜨릴 도끼와도 같은 발차기였다.

“우아우치!!”

“왜 갑자기 영어식으로 비명을 쏟는 거야…….”

“트렌드다.”

“트렌드……. 어느 시절의?”

“글쎄? 한 10여 년 전?”

“그런 건 트렌드라고 안 불러.”

“그야 그렇지.”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나는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걸 느꼈다. 결코 직격당한 허벅지의 고통 때문이 아니다.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야!

“서점에서 아르바이트 했다며? 서점 오빠한테 들었어.”

“그 형은 나를 변태라고 생각하겠군.”

“뭐? 왜 그래, 뜬금없이?”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 상담해줄 수 있는 인간은 이 눈앞의 여동생이 유일하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도망치고 있었던 거다.

다른 대책도 없이, 그냥 현실도피로.

진짜 한심하다.

“별로 뜬금없지는 않아.”

나는 여동생의 말에 대꾸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결심을 굳히고.

* * * * *

사실은 암살자의 편지를 먼저 떠올리고 거기다 살을 붙여간 게 이 소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목이 저렇게 된 건지는 지금 생각해도 의문입니다.

실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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