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재밌었다.

그것도 무지.

왠지 조금 분했다.

“그렇지만 툴킨은 죽었다고!”

나는 외쳤다. 니체가 신은 없다며 외치고 피를 한 말 토하며 죽었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 니체는 그렇게 죽지 않았다고?

“툴킨은 죽지 않았어! 설령 죽었다고 해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영원히 살아있을 거야!!”

내 옆을 걷던 누군가가 갑자기 그렇게 버럭 외쳤다. 까, 깜짝이야!!

“안녕하세요?”

그리고 내 쪽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방금 인사 받은 건가, 나? 그제야 나는 상대의 얼굴을 관찰할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10대 중후반 정도의 소녀, 그것도 꽤나 미소녀였다. 미소녀라는 표현 너무 자주 쓰는 것 같았지만 여하튼 그랬다. 아, 젠장. 왠지 분하네? 소설 쓴다는 놈이 이렇게 표현력이 부족해서야. 아아, 그래. 그렇다면 10대 중후반 정도의, 눈웃음이 매력적인 소녀 정도로 표현하자. 그럼 되겠지?

……되긴 뭐가 돼.

최근 들어 현실도피가 버릇이 된 나 자신을 통탄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상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누구세요?”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라니 소설세계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사람이 이상해진 원인은 나 때문이리라는 현실은 필사적으로 무시하면서.

“그러는 당신은 누구세요?”

자칭여동생이 끼어들었다. 어떤 의미로는 적절한 대응이었다. 좀 다른 대응은 없었을까 고민해야할 정도로.

“아, 그러네요. 제가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1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눈웃음이 매력적이고 살짝 도톰한 입술이 인상적인 소녀가 자신의 편평한 가슴에 손을 대며 자기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암살자입니다. 성은 암에 이름은 살자입니다.”

에? 살자? 이 특이한 이름이라니……, 소설 속 등장인물일 가능성이 높아졌군. 그래서 내가 그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 자칭여동생이 끼어들며 외쳤다.

“제 이름은 제갈매예요. 오빠는 제갈자구요. 합쳐서 제갈자매~!”

“………………어이?!”

멋대로 남의 이름을 바꾸지 마!

“아아……. 제갈형씨로군요.”

“누구 맘대로?!”

“논리적인 추론의 결과. 맞죠?”

그렇게 말하면서 매력적이라 서술한 바 있는 눈웃음을 지었다. 인상적이라 서술한 바 있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논리 좋아하네…….

“그런데 형씨.”

“그렇게 나오깁니까…….”

“왜요?”

하긴 내 이름을 형이라고 알고 있다면야 별로 무례한 호칭도 아닐 터다. 문제는 내 이름이 ‘형’이 아니라는 거지만…….

“아뇨, 아무 것도.”

이 시점에서 내가 사실은 제갈남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남씨라고 말할 것 같았다. 무슨 사씨남정기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여하튼 그런 연유로 나는 내 이름을 밝히길 포기했다. 무언가 중요한 걸 포기하고만 것 같았다.

“그런데 제 이름을 듣고도 놀리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군요. 보통 이런 자기소개를 하고나면 저를 놀리기 마련인데.”

살자씨는 다시 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은 놀릴 타이밍을 자칭여동생 때문에 놓친 것뿐이지만, 나는 대충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기는 쉽지 않죠. 그런데 자주 놀림 받나보죠?”

“네, 그야 뭐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소릴 하면서 웃을 수 있다니. 대단한 소녀다.

“그만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인간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죠. 아아,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런 소릴 하면서 웃을 수 있다니! 대단한 소녀다!!

“그런데 형씨.”

“아, 네.”

포기했다고 아까 말했을 터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큰 소릴 내던데, 왜 그랬죠?”

눈빛이 날카롭다.

무섭다.

아마도 나보다 연하일 텐데 어른스러운 어투와 목소리, 무너지지 않는 표정이 묘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제가 알기로 반지전쟁은 3탄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소녀의 눈치를 보면서.

“아아, 있죠. 그런 사람.”

살자씨는 씨익 웃었다. 생긋이 아니라 씨익.

“원전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편협한 사고와 시야로 세상을 살기 얼마나 어려울지! 아아, 생각만 해도 한탄과 연민이 치밀어 오르는군요!!”

……잠깐, 나 지금 꽤 심한 말 들은 거 맞지 않나?

“그렇죠, 그렇죠! 원전주의자는 재수 없지 않나요? 어머나, 별 꼴이야.”

자칭여동생이 갑자기 끼어들어 살자씨와 의기투합했다. 어이…….

“야! 나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아, 아파?! 물리적인 공격이 아닌데도 아파?!

“그냥……, 내가 알기로는 반지전쟁은 3탄으로 끝났…….”

“그게 원전주의자라는 겁니다!”

“그게 원전주의자라는 거야!!”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뭐야, 이 사람들.

“툴킨 1세는 확실히 죽었어요! 옛날에 죽었어!! 하지만 1세의 작품만이 진짜라고 하는 건 너무 편협한 시각 아닐까요?”

“그래! 툴킨 3세의 작품들은 재미있고, 중간계의 설정을 뒤트는 일도 없잖아! 오빠는 왜 예전부터 툴킨 3세의 작품은 하나도 읽지도 않고 인정하지 않는 거야? 나는 그게 너무나도 슬퍼!!”

“사, 3세?!”

그냥 넘어가기 힘든 말이 나왔다. 툴킨 3세라니, 이래도 되는 건가?! 무슨 루팡 3세도 아니고! 툴킨의 아들이 실마릴리온 같은 작품을 낸 것까지는 알고 있지만 3대에 이르러 아예 새 작품이 나왔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프로도가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같은 대사를 한 거였군.”

“그런 대사 나온 적 없어, 오빠.”

농담이다. 농담이랄까 현실도피에 가깝다. 하아……. 설마 이것도 내 소설에 의한 세계변혁 때문일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100일 전부터 광고를 해왔다는 설정도 어느새 덧씌워져 있고! 분명히 다른 거였는데, 그거! 잘 생각은 안 나지만!!

“나 이런 거 소설에 넣은 적 없어…….”

“엉? 원래 이거 여기 없었어?”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챈 자칭여동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살자씨가 끼어들었다. 헉, 그러고 보니 여긴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군! 나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 뭐 좋아요. 아무튼 제 말을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서점에 달려가 툴킨 3세의 반지전쟁 4권을 사서 읽도록 하세요.”

“지금 자정이 넘어서 서점은 문을 닫았는데…….”

“그럼 어쩔 수 없죠. 하는 수 없군요.”

살자씨는 그렇게 말하며 줄곧 어깨에 메고 있던 핸드백을 열었다. 핸드백 안에는 그 속을 꽉 채우고 있던 한 권의 양장본이 묵직하게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 책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제 걸 빌려드리죠. 꼭 돌려주셔야 되요! 포교용이긴 하지만 감상용을 집 밖에까지 가지고 나오고 싶지는 않거든요!!”

세상에……, 이렇게 무거워 보이는 책을 항상 들고 다닌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감상용? 포교용?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대사인데.

“……설마 소장용이 한 권 더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죠.”

불길한 예감 밖에 안 든다. 그러면서도 나는 무모하게도 질문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럼 몇 권?”

“세 권.”

“………….”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사라졌다.

“그럼 이만! 감상은 돌려주실 때 들을게요!!”

살자씨는 힘차게 손을 저으며 재빨리 우리를 앞질러 달려가 버렸다. 으음, 특수한 캐릭터다.

“설마 저 사람도 소설 속에서 빠져나온 건 아니겠지…….”

“몰라, 나도.”

내 혼잣말에 자칭여동생은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그렇다면 그런가보지. 게다가 정말 소설 속에서 빠져나왔다면 작자이자 주인공인 나한테 뭐라도 한 마디라도 했을 테니,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는 편이 현실적일 것 같다.

현실이 현실적이지 않다니 진짜 비현실적이다…….

“우리도 돌아갈까. 어쩐지 무지 지쳤어.”

“하긴 그래, 내일도 학교에 가야하니까.”

그렇게 우리도 귀갓길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을 결국 그냥 넘겨버린 채.

* * *

토요일 방과 후.

나는 홍대입구 앞 KFC 2층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었다. 점심때가 지나고 있어서 배가 고팠다. 아유 선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 사회인, 오면 단단히 뜯어먹고 말겠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청소하러 올라온 알바생의 비난 섞인 시선을 참아내고 있었다.

아, 왜 비난 섞인 시선이냐고? 그거는 조금만 추리하면 알 수 있을 일이다. 자아, 나는 손님용 좌석에 앉아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 이 3단 논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하나의 명제가 있다. 이게 뭘까?

“왜 아무 것도 안 시키고 앉아있어?”

아유 선생이 나타나서 답을 말해주었다. 답을 말해주는 선생이라니,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물고기 한 마리 던져주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이냐! 통탄스럽다!!

“늦었네요.”

“아, 응.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붙잡혀서…….”

아유 선생은 거기까지 말하다 뭐가 생각난 건지 말을 못 잇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알았으니 울먹거리지 말아요…….”

“안 울어! 나 안 우니까 바, 반말 해.”

“아, 네. 아니, 응.”

아유 선생의 그 17세인 주제에 여중생인 자칭여동생보다 더 여려 보이는 그 모습에 부성애가 싹틀……, 리는 없었다.

“식사는?”

“아직 안 먹었어.”

“그럼 먹을까? 뭐 먹을래?”

내가 주문을 하러 가려고 하자, 아유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 여기서?”

“……여기서 안 먹을 거면 뭐 하러 안에서 기다리라고 그런 건데?”

“그, 글쎄?”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이 여자가…….

“나, 나! 모바일 쿠폰 받아둔 거 있어!! 거기 가서 먹자! 맛집이야, 맛집!!”

“맛집이라면 어쩔 수 없군.”

나는 기분을 풀었다. 아까부터 청소하는 손길은 멈춘 채 우리를 바라보는 아르바이트 아가씨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우리는 KFC를 뒤로 했다. 여긴 다시는 못 오겠군.

* * * * *

원래는 톨킨 3세로 썼습니다만 크리스토퍼의 아들이 실재하는데다 직업은 소설가이기까지 해서 (게다가 톨킨의 작업물에는 손도 안 댔음) 대경해서 바꿨습니다. 얼른 각성해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라고 말해줬으면 하...ㄴ다고 쓰면 소송 걸리려나?

실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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