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기억과 기억의 홍수가, 장관이 되어 펼쳐진다.
기억은 이어진다.
그러니 인연과도 같다.



"엄마아..."



펼쳐진 장면속, 아이는 제 어미를 붙잡고 흔들고 있다.
다만 한없이 차디찬 어미는, 그 마음마저 차가운 듯 아이에게 대답 한번 해주질 않는다.



"엄마아...시유가 잘못했어요..."



아이는 다만 어미의 몸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아니, 저것은 울음이 아니었다.
눈물만을 하염없이 날려보내는 저것은, 다만 수분의 낭비이리라.
차마 제 안의 울분을 토해내지 못한 채, 쌓아만 두는 저것을
'울음'이라 칭하지는 못하리라.



"엄, 엄마아...흐으윽..."



아이는 다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소매를 적신다,
핏자국이다.
제 어미의 소매를, 붉은 물이 배어나와 적신다.
눈물이다.
다만 조금 붉어 보일 뿐인,
그저 그뿐인 눈물이리라.
그저 눈물이고, 다만 제 눈에서 흐르는 이것이,
차라리 다만 이것이 핏물이기를. 아이는 간절히 바랐다.



☆ ° ● ° ■ ° □ ° ○ ° ⊙ °《 ◇》 ° ⊙ ° ○ ° □ ° ■ ° ● ° ☆



"쿨럭, 쿨럭,큽..."



또 다시 눈을 뜨고 처음 맞는 공기는,
차갑다.
폐부 가득 들어와 심장을 얼려버리려는 듯,
더 없이 차갑기 그지없다.




"후욱, 흐윽..."



다만 그것은 너의 얼굴이리라.
너의 표정도, 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얼음장같이 차가워, 베일듯 날카로우리라.
그럴터인데, 어째서.
어째서, 너는.



"흐으윽..."



그리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는거야.



"선배, 선배 괜찮아요? 선, 선배..."
"...괜찮아."




제 속내를 숨기고 담담한 듯 내뱉는다.
그러나 결심한듯 내뱉은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걸 놓칠 유니가 아니었다.



"진짜, 진짜 괜찮은거 맞아요? 대체 왜 그런 거에요? 저번에 다신 안그럴 것처럼, 말하시고는, 대체 왜..."



흐읍.
유니는 말을 하다가도 다시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우는 소릴 들려주지 않으려 입을 막는다.
틀어막힌 입에서는 울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내뱉어버린 내 입안에선.
그저 거짓의 향취만이 감돌고 있었다.



"...진짜 괜찮아."
"내가요, 내가 선배 찾으려고 얾마나, 얼마나 돌아다닌 줄 아세요? 선배 찾으려고, 우리 가던 분식집이랑, 골목길이랑, 서점, 도서관, 공터까지, 갈 만한데 다 가고도 없어서, 내가 얼마나..."



울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으로,
뭉개진 발음으로 내뱉는 유니.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유니는, 시유에게 있어 그만큼 곤란한 상대였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사람.
밀어내고 싶은데, 더는 아무도 믿고싶지 않은데 한편으론 안아주고 싶어, 참을 수 없는 사람.
뼈가 으스라져라 안아주고 싶은데,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그 기억에 망설이게 되는 사람.
그 과거에 얽매여 차마 다가갈 수 없는, 그러나 멀어지긴 싫은 사람.
시유는 엉망이 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뭐라고요?"



유니가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얼어붙은 표정으로 반문해왔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유니는 이제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안괜찮아요."



감정을 억누르는 듯, 격하게 떨리는 목소리.
분노를 꾹꾹 담아 눌러두고 참아내는 목소리.
차마 그 분노를 펼쳐낼 상대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목소리.
시유는 그 안타까운 목소리에 대답해주었다.



"괜찮아.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난 그저 믿고 싶었을 뿐이야. 난..."
"안괜찮다고!!!"



횡설수설 어쩔줄 모르는 시유의 말을 끊고,
유니가 버럭 성을 내었다.



"안괜찮아!! 하나도 안괜찮다고!! 맨날 그렇게 쉽게 죽음을 논하지 마!! 하나도 안괜찮아. 안괜찮다고..."
"......"




당황해 할말을 잃은 시유에게, 유니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안괜찮게. 이런 상황들이, 죽고 싶다는 생각들이 당연하고 괜찮은 걸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당신이 못하겠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거야."
"......"



말을 잃어버린 시유는, 다만 유니를 바라봤다.
유니의 당차고 억센 포부가 그녀의 세계를 환히 밝히는 듯 했다.
시유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만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돌아가요, 진짜. 이번엔 안놔줄거니까요."
"...응."
"...내가 말했죠? 안놔준다고."
"응...?"
"선배."



석양이 져간다.
유니의 머리위로, 그 붉은 머리 위로,
그 붉고 사랑스럽게 상기된,
터질듯이 붉어진 홍조위로 석양이 진다.
그 홀릴 듯이 새빨간 입술 위로,
석양이 한조각 내려앉았고,



"좋아해요."



그녀의 심장 또한,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 쳤다.
터질듯 붉어진 얼굴을 숙인채,
까닭 모르게 박동하는 심장이 원망스러워
그저 걸음을 재촉했다.
이 죽을 것만 같은 박동은, 무엇일까.
심장이, 가슴이 아프다.



"좋아해요."



심장이 터질듯 전신 세맥으로 피를 보낸다.
그러다 갑자기 서커스를 하듯, 거꾸로 피를 보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내장이 모두 짓이겨진 듯.
그런 고통이 느껴진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
그녀는 한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좋아해요, 선배."



아.
아니었다.
이 고통은 고통이 아닌 희열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심장의 이질적인 박동과,
난생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치 앞도 못본 까닭은 그녀의 눈이 유니만을 좇은 까닭이다.



"사랑해요, 선배."



쿵.
쿵.
맥동하는 심장의 폭발할 것만 같은 박동을 들으며.
그녀는 다만 이대로 눈을 감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가을.
마음이 죽어가는 계절.
마음의 무덤인 계절.
그런 가을에도, 꽃은 피었다.

서로의 마음이 겹쳐진, 두번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