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시점]

 

"무얼 원하니?"

 

 

 

 

 

 

 

 

 

 

 

 

 

 

 

 

 

 

 

 

"......뭐?"

 

 

 

 

 

 

 

 

 

 

 

 

 

 

 

 

 

 

 

 

"무얼 원하느냐고."

 

 

 

 

 

 

 

 

 

 

 

 

 

 

 

 

 

 

 

 

 

 

"......그런건 없어."

 

 

 

 

 

 

 

 

 

 

 

 

 

 

 

 

 

"거짓말.거짓말.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난...원하는 게 없는 걸."

 

 

 

 

 

 

 

 

 

 

 

 

 

 

 

 

 

 

 

 

 

 

 

 

 

 

"거짓말.거짓말.거짓말."

 

 

 

 

 

 

 

 

 

 

 

 

 

 

 

 

 

 

 

 

 

 

 

 

 

 

 

 

 

 

"진짜야. 나는..."

 

 

 

 

 

 

 

 

 

 

 

 

 

 

 

 

 

 

 

 

 

 

 

 

 

 

 

 

 

 

"거짓말!!!"

 

--------------------------------------------------------------------------------------------------------------------

 

"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땀에 젖어 녹초가 되어있었다. 

이곳은 내 방이다. 그럼 아까 그건 꿈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와 그 얼굴......마치 칼로 여러번 난도질 당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것의 머리에는 짧은 단도(短刀)가 박혀있었는데, 그 무늬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름다운 장미 무늬의 그 단도에는 누군가의 이름도 함께 적혀있었는데, 그것만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아, 하아..."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심란하다. 이런 꿈을 꾸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슴은 답답했고 머리는 지끈거리며 조여오듯 아팠다. 어느새 식은 땀으로 침대보까지 적셔버린 나를 보고 집사님이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신 겁니까?"

 

그러더니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자기 이마에도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두통약이라도 드시겠습니까?"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저 악몽을 좀 꾸었을 뿐이에요."

 

그러자 집사님은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니, 세계 3대 기업인 '심연'그룹을 물려받으실 분께서 이러시면 안되죠. 오늘도 과외만 5개가 넘게 있단 말입니다.

아,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내가 점퍼를 입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계속되던 잔소리는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고서야 멈추었다. 할아버지는 그저 집사님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하고는 우리와 동행했다.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점점 그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져 갈 때, 할아버지가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여셨다.

 

"김비서, 나는 말이지..."

"예, 회장님! 말씀만 하십시오!"

 

잔뜩 긴장한 집사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저 집사님의 머릿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 집사님 머릿 속엔 그저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온 대가로 할아버지께 포상이라도 받을까 하는 생각 뿐일 것이다. 저 돈벌레의 머릿속은 안봐도 뻔했다.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어. 그런데 내 손녀마저도 공부에 소질이 없다면, 내 가슴은 사무치게 아플 것 같네."

"아."

 

지금도 잘 알 수 없었다. 집사님은 지금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망'은 곧 나를 향한 책임의 회피와 분노로 바뀌었다.

 

"걱정마십시오, 회장님. 확실하게 교육중이니까요. 그저 손녀분이 너무 방탕해서 학업보다 노는 것에 관심을 두어서 염려가 될 뿐입니다."

"빠악!"

 

두개골을 울리는 켱쾌한 소리. 할아버지의 강 스매시에 맞은 집사님은 말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말이 도를 지나쳤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내 앞에서 그 누구도 내 손녀에 대해 비난할 순 없네, 김비서. 그 누구도 말이야."

"예, 회장님."

"난 그저 내 손녀를 '회유'그룹 회장놈 손자와 결혼시키려면 기본적인 지식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내 손녀가 어디가서 뒤처지진 않잖아? 외모만으로도 어느정도 따 놓은 당상이다만...그걸론 부족해. 그리고 난 외모만 믿고 설치는 녀석에겐 이 '심연'의 회장직을 넘겨줄 생각이 없네."

 

뭐, 내가 얼굴만 믿고 나댄다고? 웃기지마, 그럴 시간도 내겐 주지 않았으면서...애초의 그놈의 회장직도 관심 없다고...

 

"차는? 설마 내 손녀를 걷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먼거리를?"

"람보르기니로 준비해 뒀습니다."

"쯧, 그런 구식차는 질린다니까. 제대로 굴러가기는 할려나 몰라."

 

할아버지는 3억짜리 자동차에 어울리지 않는 불평을 하며 차에 탔다. 나는 항상 그러듯이 뒷좌석에 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나더러 조수석에 타라고 하셨다.

 

"제가 여기 타면, 집사님은요?"

"김비서는 남아서 할 업무가 있다."

 

평소같았으면 어째서냐고 따졌을 테지만, 꿈 때문에 아직도 심란했던 터라 나는 그냥 '그렇구나'하고 차에 탔다.

 

"그래, 요즘은 '노인과 바다'에 빠졌다고?"

 

할아버지는 고속도로가 거의 끝날때쯤 내게 말을 거셨다. 나는 별로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들릴 듯 말 듯 작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창문에 팔꿈치를 대어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좋은 작가지. 물론...그의 작품중 단연 최고로 꼽히는 것은 <노인과 바다>이지만, 그것에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또 공부. 그놈의 공부가 그리도 중요하면, 차라리 공부하는 기계를 살것이지.

 

"그런데 나는...어? 너 표정이 그게 뭐냐?"

 

아무래도 마음이 너무 심란한 나머지 표정조절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때다 싶었는지 아예 대놓고 나를 응시하면서 구박을 했다.

 

"너 나중에 회장이 되면 인사회담도 나누고 그래야 되는데 그런 어두운 표정 지어서 되겠어? 하여튼 너는..."

"이젠 제 표정도 제맘대로 못하나요? 운전이나 잘하시죠."

 

순간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더욱 화가 나고 흥분해서 외쳐댔다. 

 

"뭐?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예절교육이 그리운 모양이구나?하여튼 너는..."

 

어느새 차는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 앞에 보이는 저것은...사람?!

 

"운전!"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도리어 화를 냈다.

 

"운전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너는..."

"앞에! 사람있다고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앞을 한번 보시더니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돌렸다. 그러나 결국 우리 차는 그 사람을 쳤고, 한번 덜컹거리며 차가 무언가를 밟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눈을 떴을 때 앞쪽 창문은 전봇대에 들이 박혀서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창문들도 충격 때문에 일그러져 보이지 않았다.

 

"으으...어?"

 

손으로 머리를 한번 감쌌다가 폈더니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손에 상처는 없었다. 아마도 머리가 찢어진 것 같았다.

 

'졸...리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고통은 서서히 밀려나가고, 졸음이 내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몸이 편안해지고,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늘에 빛이 보였다.

아아, 여기가 천국인가. 아님 지옥인가. 지옥은 아니었으면 좋겠네.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

 

빛 위에서 무언가가 뻐끔거리며 말을 하려 했다. 그것의 입이 마구 뻐끔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지 못했다. 이윽고 드디어 그것이 외쳤다.

 

"마음대로 생을 버리지 말아라! 그것은 네가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다!"

 

 

--------------------------------------------------------------------------------------------------------------------

 

 

"으으음..."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무슨 꿈을 꾼것 같았다. 아주 슬프고, 무서운 꿈을...

누군가에게 꿈속에서 꾸중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꿈이었다. 여긴 현실이다.이제 눈을 떠야 했다.

그러나 눈이 떠지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은 내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말을 하는거야..."

 

어느 순간, 나는 눈이 떠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환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진짜 빛이 아닌것 같았다.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더 이상 꿈을 꾸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깨어나야 했다.

그래, 여긴 병원이었구나.

 

"아가씨!"

 

무슨 소리지? 아까까지 안들렸는데, 눈을 뜨고 나니 약간 들린다. 그래.. 이 목소리는 할아...버지가 아니다.

지, 집사님? 할아버지는...

 

"우, 우리 할아, 버지는요."

"회장님은 교통사고 처리반의 문서 처리 및 서류 정리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검은 색으로 뒤덮였다.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에 대한 사과를 하는 건 당연하다.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검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갖 악랄한 말이 떠올랐다. 그걸 하나하나 다 내뱉고 나면, 집사님과 의사들도 공포에 질려 덜덜 떨것이다.

머리가 띵-하고 아파오면서 서운한 마음과 분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 악랄한 말을 다 내뱉고 싶었지만, 너무도 악랄하고 공포스러운, 검디 검은 말이어서 나조차 공포에 질렸다.

결국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나는 부끄러운 눈물을 흘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집사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정말 못해먹을 짓이지만 그걸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기업이미지만을 생각했다.

내 입장은 고려해주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아가씨랑 같이 왔던 그 남자도 지금 이 병원에 있는데, 괜찮대요. 그러니까 아가씨도 멀쩡할 거에요.

두려워 마세요."

 

그제야 끊어졌던 생각이 이어졌다. 누군가 머리를 탁-하고 한대 때린 느낌이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

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나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난, 최악이다.

 

"그 사람,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

"아,아니 301호실에..."

 

집사님은 내가 그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걱정한 것에 대해 대단히 놀란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고 즉시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제야 내 할 일을 하는 느낌이다. 이제야 역겨운 가면을 벗은 기분이다.

 

'최소한, 사과라도 해야 해. 내가...용서 받지 못한다 해도.'

 

301호실의 문을 마구 두드려 댔지만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아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병원 관계자가 다가왔다.

 

"저기요, 무슨 볼일이라도..."

"여기!여기 301호실에 있던 환자 어디있어요?"

"퇴,퇴원한다고 안내데스크로 내려갔는데요? 일행이라 문 두드리신 거 아녜요? 그것도 몰라요?"

 

그 남자는 나를 더욱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아직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그 말을 일일히 다 들어주려면 시간이 반나절이 있어도 안 됬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로 냅다 달렸다.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마구 눌렀지만, 엘레베이터는 7층에서 내려오지를 않았다.

 

'엘레베이터에 호랑이라도 태우는 거야, 뭐야?'

 

그때 내눈에 비상계단이 들어왔다. 나는 즉시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내데스크에서 막 퇴원증명서를 끊고 나가려는 남자 한명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저기요..헉..헉.."

 

숨이 차면서도 그 남자의 손은 놓지 않았다.

분명히 이 얼굴, 이 얼굴의 남자를 차로 박았다. 게다가 바퀴로 밟고 지나가기조차 했다. 그러나 내 눈앞의 이 남자는 조금의 상처도 나지 않았다. 정말 바로 퇴원해도 될 정도로 말짱했다. 그리고 지금 막 달려와서 난데없이 손을 잡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봐요...헉...헉...당신...어떻게..."

 

나 이수진, 이 자리에서 맹세하노라.

내가 앞으로 겪을 수많은 일들 중에서 지금처럼 이상하고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제2화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