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1

 

“회합을 시작하겠소.”

 마뉴아는 둔중한 빛을 띈, 흑실로 수놓인 자신의 검은 튜닉을 지그시 쓸어내리며

원탁의 소환에 뒤늦게 도착한 클레르를 책망하듯 노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림자로부터의 소식은?”

 회합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이번엔 작지만 날카로운, 찌르는 듯

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울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멘지스가 회랑의 

마지막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출 때까지나 늦어버린 클레르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왕국의 존망을, 아니 그 자신들의 존망을 판가름할지도 모르

는 이 밀실회합에 서부해협의 너절한 몰락귀족이 배석하는 것이 몹시나 못마땅했

다. 그는 마뉴아가 클레르 같은 애송이를 회합의 원탁에 참여시키는 것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는 정보입니다.”

 약간은 주눅이 든 클레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순간 격벽에 둘러싸인 거대한 원탁 

주위에 짧은 신음이 울려 퍼졌다. 어둠에 갇힌 이 밀실속 원탁을 미약한 화톳불만이 

비추고 있었기에, 그 면면을 세밀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구성원들 대부분이 놀라

는 눈치였다. 원탁의 한 모퉁이에 어색히 자리하고 있는 클레르 역시 회합의 일원이

었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기밀을 요하는, 봉분을 하사받은 영주 이상으로만 구성된 

이 원탁의 회합은 결코 자신 같은 존재가 참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참석자가 아닌 배석자였다. 멘지스의 실낱같은 빛줄기조차 침투할 수 

없는 이 격리된 격벽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갇혀있는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었다. 

클레르는 자신이 가졌던 예상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이곳은 그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랬다. 이곳에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한숨을 내쉬며 마뉴아는 이마로 흘러내린 자신의 백발을 쓸어올렸다. 물론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다만 서신은 예상을 확인해준 것 뿐이었다. 복잡해졌군. 결국 '그'

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그는 습관처럼 입가의 주름을 매만졌다. 입가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의 연륜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지혜가 연륜과 비례하지 않음에 한탄했다. 

 “승전치 못한 책임을 물어 그를 탄핵해야 합니다.”

 피네베테가 그를 몰아붙였다. 좀전 클레르를 향했던, 경멸이 담긴 어조가 귀에 거슬

렸지만 마뉴아는 피네베테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공격해야 할 때

였다. 하지만 경거망동할 수는 없다. 가급적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른 마뉴아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

 피네베테가 다시금 끼어들어 뭐라 중얼대었지만 마뉴아는 신경쓰지 않았다. 피네베

테 백작은 아직 젊다. 그의 혈기왕성함은 경솔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맞설 수 있는 것일까. 젊음이란 무서운 것이다. 젊음은 그 자체로 큰 자유를 선사하지

만, 그 자유에서 나오는 파괴력은 무서운 것이다. 그는 가끔은 그 에너지가 두려웠다. 

마뉴아는 점점 복잡해지는 자신의 생각을 지그시 누르며 대답을 구하듯 어둠 속 좌중

을 둘러보았다. 

 “명분이 약합니다. 더구나 정전은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왕의 암묵적인 재가까지 

 있었지요. 압박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마뉴아는 소리의 발원지로 고개를 향했다. 그곳에는 수도의 기병을 총괄하는 뒤랑 장

군이 정좌하고 있을 터였다. 어둠에 묻혀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그의 목

소리였다.

 “경은 마치 왕당파의 끄나풀처럼 말하는군.” 

 피네베테는 다시금 예의 그 신경질적인 어조로 상대를 쏘아붙였다. 이번엔 빈정거림

도 함께였다.

 말을 가로막힌 뒤랑은 잠시 침묵했다. 왕당파와 귀족원의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

니었다. 루이리옹 왕조의 집권 이후 귀족들과의 대립은 이앰느의 근대 역사 가운데 형성

된 왕국의 속성이었다. 갈수록 심화되는 대립은 급기야 로마노비치 공국을 향한 국왕의 

침략으로 나타났다. 대귀족들의 사병을 전쟁터로 내몰아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

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본국 및 타국들간 외교상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고려치 않은, 실

패한 결정이었다. 

 "그는 색이 없는 자입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지요."

 말을 이은 뒤랑에게 마뉴아는 그렇기에 그가 두려운 자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 안의 무엇인가가 그를 가로막았다. 귀용. 그는 군권을 위임받았음에도 불구

하고 왕당파에 몸을 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자신들의 세력에 편입시키기 위해 대귀족들

은 갖은 모략를 동원하였지만 그는 귀족원에도 거처를 두지 않았다. 귀족들의 전유물인 

살롱에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보는 좀처럼 알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는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를 건드렸을 경우의 이해득실을 따져보는게 우선입니다."

 또 다른 마뉴아가 짧게 말했다. 신중하고도 묵직한 어조였다. 회합의 시작을 알린 마뉴아, 

아니 제 1마뉴아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골 후작일 터였

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귀족원의 판단으로 귀용은 왕당파에 더 가까웠다. 국왕과 귀족들간

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군권을 쥐고 있는 귀용의 행보에 따라 미묘한 힘겨루기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었다. 평소 그의 생각은 일리가 있어 설득력이 강했다. 

 "공작께서는 어떠신지."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주로 지위를 세습한 젊은 귀족들로 구성된 이 회합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지금은 백발의 늙은이가 필요할 때였다. 제 1 마뉴아, 로쟁 공작. 그의 

연륜과 정치의 경험이 필요했다. 

 "이곳에 오기 전, 왕당파 찌꺼기들이 급히 흩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왕의 심기가 불편

 한 모양이더군."

 공작은 그의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다. 여우 같은 늙은이. 의중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화를 슬쩍 흘려버리는 로쟁에게 골은 얄미움을 느끼면서도 자신 또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응수했다.

 "득보다 실이 더 컸으니 왕의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우리와 뜻을 같

 이 하는 것 또한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불확실성이 너무 큽니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매력이긴 하지만."

 귀족원을 구성하는 대귀족들 중에서도 원탁에 모인 마뉴아들, 이들은 급진적인 입장을 내

세우는 급진파였다. 그들은 귀족원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제후들의 사병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공국과의 전쟁으로 내몬 국왕을 이대로 계속 옹립해 나갈수는 없다는 것에 생각을 

같이 했다. 개혁이 필요했다.

 "결국 왕은 승전하지 못했습니다. 기회입니다. 귀용의 축출을 시작으로 왕당파의 끄나풀들

 을 압박해 들어가야 합니다!"

 피네베테는 자신의 생각을 굽힐 뜻이 없었다. 그는 답답했다. 이들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

의 생각으론 적어도 자신들만큼은 단합을 이루어야 했다. 일치를 보여야만 했다. 공국과의 개

전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실행은커녕 아직도 입장이 조율만 되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갑자

기 화가 치밀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저 역시 피네베테 경의 생각과 같습니다." 

 새로운 목소리가 밀실을 울렸다. 좌중을 일순 침묵에 빠뜨린 권위를 담은. 그리고 그 권위 속

에 담긴 현명함. 순간 회합의 귀족들은 밀실의 구조에 대해 자신들이 무지했음을 깨달았다. 그

리고 그 직감은 불쾌감과 불안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으로 이어졌다. 기밀유지에 따른 안정

성을 위해 회합은 매번 다른 장소에서 은밀히 주선되었고 그에 따른 세부적인 사항들은 제1마

뉴아, 로쟁 공작에 의해 전서구를 통해 은밀히 공지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인물이 밀실에 모습

을 드러냈다는 것은 첫째로 로쟁의 초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둘째로는 회합 구성원들의 

추인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두번째 요건이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

다. 즉 추인은 아직 성립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는 아직 두번째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 내면의 꿈틀거림은 금세 잦아들었다. 이 남자, 이 인물의 등장은 그만한 

영향력과 가치가 있었다. 원탁이 아닌 격벽 저편에서 울려오는, 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목소리

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협정은 현명했고 결과적으로 득이 큰 결정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왕은 공국 뒤에 도

 사리고 있는 제국을 건드렸지요. 게다가 승전은 커녕 병력의 손실로 국력만 소모되었고 서부대

 륙의 균형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진중하고도 묵직한, 권위와 카리스마를 동반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격벽 뒤에서 조

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쉥즈 위에 검은 블리오를 걸친, 살롱의 유행과는 사뭇 다른 보수

적인 감성이 묻어나는, 큰 키의, 훤칠한 외모의 젊은 사내였다.

 "여러분들은 이 점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마침표를 찍는 듯한 그의 확신에 찬 어조는 회합자들로 하여금 잠시간 말을 잊게 만들었다. 그

의 젊은 용모에 걸맞지 않은 권위있는 어조와 완벽에 가까운 귀족적인 이앰느어 발음이 그의 발

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이앰느를 대변하는 자. 이앰느인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이앰느인

이 아닌 자.  

 "다들 아실 것이오."

 로쟁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침묵에 빠진 좌중을 일깨웠다. 

 "반갑다고 해야할지."

 후작이 짧게 말을 받았다. 골은 공작을 향한 자신의 순간적인 적대감을 숨기기 위해 말을 아꼈

다. 그는 자신들에게 얼마간의 정치적 이권을 가져다주는 댓가로 종국에는 더 큰 것을 지불하게 

될지 모르는 이 위험한 동맹에, 그리고 그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공작의 처사에 불현듯 분노가 

피어올랐지만 쉽사리 감정을 표출하는 짓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었기에 스스로를 통제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이 인물에게 동조한다는 뜻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왕당파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 잠재적으로 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였다. 그런 것

쯤을 계산치 못할 늙은이는 아닐텐데. 그에게는 공작의 의중이 가장 중요했다. 무언가 숨겨둔 수

가 있겠지. 교활한 작자니까.

 "미리 알리지 못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역시 이렇게 되고 말았군. 사실 귀족원에 소속되지 않은 신분의 누군가-상당부분 검증가능 하지

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를 회합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더욱이 구성원의 동의없이 자신의 독단

적인 판단으로 회합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회합의 주최자인 자신으로써도 상당한 도박이었다. 하

지만 현 시점에서는 필요한 한 수의 조치였다. 공작 또한 피네베테의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조하는 

바가 있었다. 탁상공론은 뚜렷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렇게 소모되는 시간만큼 왕당파를

비롯한 신흥귀족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큰 원군을 얻었군요."

 화색이 만연한 피네베테의 어조가 딱딱히 굳었던 밀실의 공기를 잠시간 녹여주었다.

 "대륙의 거미라 일컫는 귀공의 능력이라면.."

 "그건 제 주군의 별칭이지요. 저는 거미줄에 불과할 뿐입니다."

 피테베테와 자신이 초대한 원군의 짧막한 인사치레는 공작에게 무언의 자신감을 제공했다. 분명 

피네베테는 경솔하다. 그의 안목은 보잘것 없다. 그는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눈 앞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별다른 경계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미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

다. 이는 이미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네베테는 귀족원의 젊은 세습귀족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 그의 동의는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이젠 머리가 굵은 뱀들을 걱정해야겠군. 하

지만 그들로써도 뾰족한 수는 없을게야. 이미 회합의 존재를 알고서 회합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를 내쫓을 수는 없을테니. 

 "묘안이 있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받아들이겠소."

 후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달리 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작센의 귀족들은 개혁에 성공했지요. 국왕에게 책임을 물어 체재의 대대적인 개편을 이루는 것만

 이 귀공들을 위한 길임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이대로라면 모든 관직이 장사치 놈들에게 잠식되고 

 말테니까요. 물론 거기서 그친다면 다행이겠지만 말입니다."

 "말이 쉽소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곳에 온 것입니다. 당신들에겐 내 도움이 필

 요하니까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오?"

 뒤랑장군이 후작을 대신해 조심스레 물었다.

 "귀용을 섣불리 건드리게 되면 오히려 더 골치아픈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 점은 다들 잘 알

 고 계실테지요."

 ".."

 "반대로 귀용의 무사귀환과 함께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게 된다면 왕당파는 얼마간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귀용이 왕당파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왕과 직결되는 부분도 아닙니다." 

 "본론을 듣고 싶소."

 뒤랑이 재촉했다. 화톳불에 반사된 남자의 그림자가 희번덕 대며 남자의 실루엣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이목구비가 준수한 깔끔한 용모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렇기에 더욱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내며.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명료하게 말했다.

 "귀용의 철군을 막고 국왕청을 강제해산시켜야 합니다."

 순간, 모든 마뉴아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내뱉은 짧은 헛숨이 불길한 두려움이 되어

그들 모두를 엄습해왔다. 그들은 오늘의 이 회합이 결코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아무도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차가운 정적 속에, 오직 일렁이는 화톳불만이 혓바닥을 날름대며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1-3. 2

 

 남작은 눈을 감았다. 으레 이 숲을 지날 때면 그는 강박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 예민해진 

그의 후각이 역시나 피내음을 감지했다. 바람에 실려오는 옅은 피비린내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흔들리는 마차의 요동만큼이나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곳. 구도자와 세속인의 간격 그 중간쯤 어디

에서 방황하는 그를 무력한 철창속에 가두어 버리는 곳.  

 '상인의 달'이 지나면 길을 새롭게 내야겠군. 자신의 영지에 접어들때마다 그가 습관적으로 되뇌었

던, 수백번 다짐해왔던 생각들을 떠올리며 남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국왕청에 의해 지

난 수년간 허락되지 않았다. 영지로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훈계를 주기 위함이라는 국왕청의 조서

는 영지의 모든 농민들을 두렵게 만들었고 영주인 그에게도 정처없는 분노와 우울감을 가져다주었

다. 게다가 이앰느의 중북부 지방을 다스리고 있는 다른 영주들에 비해 자신은 비교적 온화하게 봉

지를 다스린다는 사실외에는 별다른 위안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무력감까지 안겨주었다. 

 곧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계절의 변화마냥 어김없이 그에게 찾아올 것이었다. 이달 

동안은 상인의 달을 맞아 왕국 전체의 생산과 교역을 증대시키기 위해 대륙의 수많은 상인들이 영지

를 오고갈 것이기에 잔혹한 법률의 집행은 억제될 것이다. 하지만 상인의 달이 종료됨과 동시에 영지

의 수많은 여인들은 국왕청의 강제집행에 의해 또다시 화형대로 끌려갈 것이었다. 그리고는 병정들

의 노리개가 된 후 불태워지겠지. 목이 잘리겠지. 교국의 마녀라는 명목으로. 바로 이곳에서.

 그는 국왕청의 지각없는, 아니 총기를 잃은 국왕의 통치에 넌더리가 나 귀족원에 편입했던 자신의 

옛적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선 다시금 자신을 책망했다. 국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오직 자

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귀족원에 몸을 담고서, 그는 자신 또한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도자로써 공부해온 성전Holy Script의 참된 진리를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가운데 드러내겠다는 선한 욕망은 오간데 없이, 이권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벌이는 귀족들과 동화되

어 가고있는 자신을 보며 그는 깊이 절망했었다. 그런 그에게 로쟁은 손을 내밀었다. 왕국 전체를 위

한 개혁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회합에 동참하라는 그의 제안은 뿌리치기 힘든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손을 잡았다. 

 "나리. 이제 영지가 보입니다요!"

 탁하게 쉰 마부의 현실감 있는 목소리가 상념에 잠겨있던 그를 현실로 일깨웠다. 을씨년스러운 숲

을 벗어나자 마부의 말대로 넓은 구릉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멘지스의 차가운 

빛 아래 벙어리마냥 침묵을 지키며 고위귀족들의 술수를 감내하는 고통을 겪었던 그에게, 온기를 지

닌 디에스의 온화한 빛이 영지 전체를 환하게 비추며 평안을 선물하고 있었다.

 숲에서 영지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내달리는 마차에 몸을 실은 채 남작은 점차 가까워지는 영지를 여

느때와는 다른 기쁨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려 가도에 접어들자 영지의 이정표

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인 장정만한 큰 목재로 세워진 이정표 위에는 '기즈'라는 영지명이 큼

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기즈령을 하사받아 기즈 남작이 된 후로, 그는 영지내의 영민들의 복지를 위

해 힘써왔다. 소작농을 줄이고 자작농을 늘렸으며 질병에 신음하는 영민들을 살리기 위해 왕국 아카데

미를 수료한 의학자들을 영지로 초빙하는데 금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중북부에서 평판이 좋은 영

주였으며 그런 기즈령의 영민이 되기 위해 이앰느 곳곳의 많은 농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영지는 상인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한 분위기였다. 영지로 돌아온 기쁨도 잠시, 측은함이

기즈 남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왕은 전쟁의 여파에 따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국고를 채우기 위해 

더욱 무거운 세금을 물릴 것이다. 그리고 대영지를 가진 영주들과 귀족들에 의해 큰 분쟁이 수도를 잠

식하며 왕국 전체를 아우르는 분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것이 이번 회합에서 논의된 결과였고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이앰느를 지탱하고 있는 비천한 이들에 대한 염려는 어디에도 없었다. 통치자들에 의

한 여파는 오롯히 힘없는 자들, 가축들과 함께 먹고 자는 바로 이들에게 전가될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못마땅했고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래서 회합 내내 침묵으로 일관해온 터였다. 남작은 공작이 제안하고 

설파했던 이상 따위는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세습귀족이었지만 겨우 삼대에 

걸친 세습귀족이었다. 공을 세운 그의 조부가 하사받은 작위가 아니라면, 그 또한 저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에게 하위계층에 대한 자신의 연대의식이 아직은 남아있음을 자각했다. 

 멀리서 그의 마차를 알아본 영민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남작은 답답한 마음에 놓여있던 책을 

주워들었다. 이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이앰느에 불꽃같은 혁명을 일으키려 시도했던 인물이

라면 현재의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남작은 책을 펼쳤다. 쟝 아쥬흐. 북방의 야만적 

신화를 몰아내고 교국의 썩은 행태를 비판하며 이앰느의 통치와 권세들에 대항했던 근대의 마지막 개혁

자. 진리를 감당치 못한 이앰느는 그를 화형대에 매달아 재로 만들어 공중에 흩날려버렸다. 격조높았던 

가르침과 절규.. 그리고 불꽃같았던 그의 삶. 의인의 수고는 무엇을 낳았던가. 

 "나리. 남작부인께서 나와계십니다요."

 약 백야드 떨어진 곳에 가솔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와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체면을 지키지 않고 

마차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저택을 등지고 서서 손을 마주 흔드는 그들을 보며 문득 알수없는 연민

이 그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귀족인 자신들도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귀족이라는 가면을 쓴 한

명의 농민일 뿐이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역사라는 긴 시간의 터널 속에서, 우리 모두는 남편 

잃은 과부요 내버려진 고아가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