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5살 '이호'는 오늘도 오늘도 바둑 학원을 빼먹었다. 
바둑에 대해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바둑학원 선생님은 이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호가 바둑 학원에 다니는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다. 
호의 할아버지는 이태범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꽤 이름을 알렸던 바둑기사이다. 
지금에야 사람들은 전신 조훈현, 돌부처 이창호, 마왕 이세돌만 기억한다. 
그래도 이전부터 바둑을 보았던 사람들은 속기 바둑을 시원시원하게 두던 그를 '기관총', '승부사'라 불렀다. 
바둑판에 돌을 올릴 때의 우렁찬 소리가 쉴새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피는 아들들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아들들은 평범한 바둑꾼이었다. 
평생에 있어서 바둑을 즐길 수는 있어도 높은 고지에서 아래를 내려볼 수는 없는 그릇이었다. 
이태범은 자신의 경력에서, 그리고 아들의 자질에서 좌절했다. 
그가 한평생 싸워왔던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2000년 초반 은퇴 이후에 자식들과도 멀리 있는 시골로 내려가 인터넷 바둑판과 벗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3년전 즈음에 셋째 아들 내외가 아들을 데리고 방문했을 때 일이 터졌다. 
바둑 조기교육이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좌절감을 모두 아이들에게 화풀이했던 그였으므로 자식들과의 사이는 소원했다. 
게다가 아들들은 대부분 바둑판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아내가 준비한 다과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듯 마는듯 하다가 결국 그는  
인터넷 바둑이나 두러 서재 안에 들어갔다. 
아내와 자식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가 잘 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재에 들어온 후 컴퓨터를 켜다가 손자 녀석이 따라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심해지면 나가겠거니 싶어서 사탕이나 쥐어주고 옆에 앉히고는 바둑을 시작했다. 
바둑을 시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바둑알을 잡는 순간부터 그에게서 외부의 감각이 차단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 판을 시작하면 나를 잊어버리고, 판이 돌아가는 중에는 수십가지의 경우의 수들이 머리를 수놓는다.  
상대의 수를 읽고 상대도 내 수를 읽고 속고 속이기를 반복하는 그 칼날 위에서 이태범은 나이가 들었어도 젊음과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한 판을 끝내고 나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버님, 저녁 진지 준비됐어요." 

며느리가 우물쭈물 서재 문을 열고 저녁 때가 되었음을 말해주어서야 현실로 감각이 돌아왔다. 

"그..그래... 그러자." 
"저희 호가 옆에서 귀찮게 하지는 않나요?" 

그제서야 이태범은 자신의 옆에 손자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그때 이태범은 또 놀라게 되었다. 
손자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모니터의 바둑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태범은 삐뚫어진 웃음을 지었다. 

"뭐가 보이기는 보이느냐? 제 아비 정도 깜냥으로는 볼 수 있는 것도 없거늘..." 

그 말에 며느리는 얼어붙었다가 황급히 서재 밖으로 나갔다. 
이 놈의 입이 화근이다.  
결국 이태범은 그 죄로 어색한 식사를 가족들과 해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저 담배 생각만 간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은 담배를 한 대 펴고 산책을 마친 후에 일어났다. 
서재에 돌아왔을 때 손자가 자신의 컴퓨터에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디로 접속된 판이었다. 
인터넷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체면과 평판을 따지면서 살아온 이태범이었기에 호통부터 쳤다. 

"이 빌어먹을 녀석!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할아비 것에 손을 대느냐!" 

가관은 그 다음이었다. 
손자는 바둑판에 눈을 들이느라 할아비의 호통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가족들이 서재로 뛰쳐들어왔다. 
그들이 들어 왔을 때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진 할아버지와 홀린듯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자가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긴장된 얼굴로 이태범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태범의 표정이 분노에서 당혹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손자가 아니라 바둑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손자의 바둑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 엉망의 바둑이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손자의 바둑에는 습관이 없었다. 
그래서 상대가 예측할 수가 없었으며 예측할 수 없기에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손자의 대전상대는 급수는 낮아도 이태범 자신도 조금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상대였다. 
그런 상대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바둑을 자신의 손자가 두고 있는 것이다. 
이태범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가족들을 외면하고 손자 옆 자리에 서서 바둑판만 바라보았다. 
손자는 상대가 정신을 차릴 새도 주지 않고 속기로 두었다. 

-또각 또각 또각 

이태범은 마치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경기 시작 30분만의 불계승. 
이태범은 첫째 충격을 받았고, 둘째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부성애가 싹트는 것을 느꼈다. 
왜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재능은 대를 건너뛰어서 전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바둑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자식들의 기저귀를 갈아줘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이 아이는 내가 키운다!" 

손자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선언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아본 셋째의 설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며느리의 분노, 이전에도 실패한 조기교육에 대한 아내의 걱정이 터져나왔다. 
바로 셋째 아들 내외는 호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떠나버렸다. 
그날부터 한 번도 가족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이태범은 자나깨나 손자 호를 생각했다. 
그 간절함은 상사병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가 잠꼬대하면서 '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의 아내도 조금은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그리하여 어찌어찌 사정사정하여 일단 급한대로 그 아이를 바둑학원에 보내게 만든 것이 작년이다. 

그런데 그 부성애의 대상이자, 바둑 조기교육의 대상 손자 '이호'가 지금 바둑 학원을 안 가고 할아버지가 준 용돈으로 pc방에서 '스톰 오브 레전드'를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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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많이 돌아서 왔지만 다음편부터는 이호의 게임을 관전해 보겠습니다.

 

연재는 화,목,금입니다.

 

옛말에 바둑을 하면 가정, 직장, 생활 중에 하나는 없었다고 합니다.

AOS게임이랑 비슷하구만 껄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