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초목마다 눈이 스몄다. 눈은 녹지 않고 달라붙어 태워진 잎을 대신했다. 햇빛을 받은 눈은 녹기와 얼기를 반복하며 반짝였다. 눈은 탐스러웠고 실속이 비었는데, 손이 닿은 자리는 부서지고 흩날렸다.

 

나는 시점을 알 수 없는 겨울에 눈을 떴다. 눈이 내려서 겨울인 듯싶었다. 의식이란 내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에게 돌아왔다. 찾은 의식 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 없음을 알았다. 나의 것임이 느껴지지 않는 정신이었다. 아득한 정신을 부여잡고 주변을 살폈다. 팔을 허우적거릴 때 허리춤에서 장대가 손에 받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대가 아니라 칼이었다. 칼집이 없는 칼이었다. 칼이 어째서 내 옆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칼의 손잡이를 잡아서 들었다. 잡은 손에서 손목의 무름이 느껴졌다. 나는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칼은 눈밭에 누인 내 몸뚱어리 옆에서 여자로 존재했다. '여자'라는 한 개체보다 물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것이 사람과 칼의 경계가 없는 무언가라는 것을 나는 설명할 수 없었으나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여자에게 신상을 물었다. 그 여자는 제 이름을 말했다. 그 여자가 말할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단어를 나열한 듯한 이름이었다. 나를 보던 그 여자는 내게 좋을 대로 부르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이보네라 불러도 좋은가.

 

이보네는 그 여자가 처음으로 말한 단어였다.

 

―그것도 좋겠지……

 

그 여자의 말은 바람소리나 물소리처럼 들렸다. 그 여자의 말은 고저가 없었다. 이보네는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피를 토했다. 갑작스러운 각혈에 몸이 안으로 굽었다. 속에서 피가 솟구쳤다. 내장이 꼬이는 듯해서 나는 몸부림쳤다. 토한 피가 몸에 튀었다. 피는 산 것의 더움이 뻗치지 않았다. 시커먼 피로 침염된 눈밭 옆으로 이보네는 몸을 옮겼다. 그 여자는 경련하는 나를 받쳐 안고 가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쓸었다. 길고 흰 손가락이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칼을 떠올렸다. 칼의 손길이었다. 손가락과 칼은 구분되지 않아서 그 구분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그 무서움 속에서 나는 다른 무서움으로 잊어야 할 것이었는데, 무서움 속에 혼재된 다른 무서움의 덩어리들은 보이지 않아서, 그것 또한 무서움이 될 터였다. 그 여자의 눈동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머리가 얇은 제 검은 비단옷 위로 너울졌다. 머리와 옷이 한 몸인 것 같다는 하나마나한 생각을 했다. 눈이 계속 내려서 내 옆으로 눈은 쌓였다.

 

핏물이 목구멍에서 끓다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그 여자에게 파고들었다. 그 여자는 헐떡이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 여자의 품속은 편안했다. 그 여자가 안을 때 내 몸 속 어딘가에서, 울어지지 않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편안함은 날카로웠다. 나는 숨죽여 울었다. 핏물이 눈에서 흘러서 시야가 벌겠다.

 

―피가 다 빠져야 해.

 

그 여자가 내 눈가를 손으로 닦았다.

 

―세상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

 

―……

 

그 여자의 말에는 건조함이 들어앉아있었다. 나는 핏물 섞인 눈으로 이보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시야로 세상은 붉었다. 그 여자의 눈이 붉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붉은 세상 속에서 그 여자를 보고 있었다.

정신이 내 것이 아닌 듯 하여 몸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것을 반복했다. 몸이 진정될 즈음에 나는 다시 이보네에게 물었다. 이보네의 말은 내가 물었던 물음들을 밀쳐놓았다. 눈살이 접히며 이보네는 초점 없이 웃었다. 그 여자가 내놓은 답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소개한 그 여자 자신은 내가 아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이보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칼이었다. 이보네는 자신이 칼이고 죽지 않는 존재인데, 자신과 나는 이어져있어서, 결국 자신과 나는 칼이자 괴물이라고 했다. 이보네의 말은 헛것을 헤집는 듯 했다. 그 여자가 말한 칼이 나와 그녀라면 칼끼리 서로의 소유를 주장하는 양상인데, 칼은 그것을 쓰는 자의 것일 테니 그녀와 내가 서로를 쓰는 것보단 나만이 그녀를 쓰는 것에 더 가까울 터였다. 칼의 말은 잘 와 닿지 않았다. 나는 눈밭에서 일어섰다. 일어설 때 다리 근육이 힘을 받지 못해 쓰러져서 바닥을 굴렀다.

 

내 뒤에서 이보네는 걸었다. 허연 눈 속에서 찍히는 발자국은 발이 옮겨질 때마다 새로이 찍혀서 정처 없어보였다. 그 여자는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걸었다. 그 여자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나와 그녀 자신이 같은 칼이기 때문일 터였다. 말로써 통하지 않는 그 여자와의 관계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말없이 걸었다. 이보네가 입을 연 것은 어스름이 질 무렵이었다. 해가 저물어서 바람이 거세어지자 내 뒤에서 걷던 이보네가 물었다.

 

―힘들지 않아?

 

그 여자의 말은 바람에 섞였다 사라졌다. 뒤돌아보자 그 여자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말은 시선에 얹혀서 가는 듯해서 이보네의 말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답했다.

 

―그다지……

 

―원래 다 그래.

 

'원래'였다. 그 여자의 대답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많이 봐 왔어.

 

―……

 

이보네가 눈을 마주했다. 핏물 빠진 시야에 들어온 그 여자의 눈은 붉었다. 그 붉은 눈동자로 이보네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상대를 끌어당기는 눈빛이었다. 눈동자가 강렬하여 나는 시선을 돌렸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그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돌았다.

 

―죽지 않으니 당신도 오래 빛을 볼 테지.

 

이보네의 말은 단순한 사실을 읊조리는 말투였다. 말은 낮고 적적했다. 그 여자가 답을 할 때 나는 진실로 무서움을 느꼈다. 그 여자의 말대로 나 역시 죽지 않아서, 그 여자처럼 건조함이 들어앉은 미소로 모든 것을 연민할 것임을 나는 알았다. 내 몸 속 어딘가에서, 밀쳐내어지지 않는 울음이 솟구쳤다. 나는 차오르는 핏물을 삼켜 울음을 밀어 넣었다. 나는 겨우 말했다.

 

―내가 죽기는 어렵겠군.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서.

 

―……

 

이보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돌아 멈춰선 내 옆으로 그 여자는 걸어왔다. 나는 몸을 돌렸다. 눈발이 휘날려서 길은 모호했다. 나는 휘청거리며 걸었다.

 

―몸조리가 필요할 테니 저기로 가.

 

이보네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수목이 우거져 안은 어두웠다. 칼이 흔들리는 팔에 닿아 덜걱거렸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발에 눈 더미가 차여 걷기에 불편했다. 밑동만 남은 나무를 피해가며 걸었다.

 

그 여자도 나와 같은 울음을 느꼈을 것인가. 그 여자는 자신과 내가 같은 것이라고 말했으니 적어도 나의 울음은 개별적인 것이 아닌, 서로의 같은 울음일 것이었다. 나는 내 옆의 이보네를 응시했다. 칼의 울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신과 내가 연결되어있단 소린가.

 

―그래.

 

이보네가 답했다.

 

―기억에 없는 당신이 나한테 익숙한 이유도 그 때문인 거고.

 

―그래.

 

―당신은 악마인가?

 

내가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맞는 것일 테지.

 

―……

 

이보네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 여자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나는 물었고 그 여자는 답했다. 걸을 때마다 눈이 스며서 옷은 젖어있었다. 눈 묻은 손은 근육이 굳어 움직이기 불편했다. 이보네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서 나는 걸었다. 바람 부는 숲 속에서, 추위는 없었다.

ps1 : 격조했습니다.

ps2 : 이전의 두 글을 합쳐 수정했습니다. 종종 수정할 계획입니다.

ps3 : 개인적으로 아끼는 글입니다. 좀 더 나은 글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학생이라 정기 연재는 힘들지만 언젠가 전념해서 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