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세주의자들은 인생의 음지만 응시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이들이야 말로 생에 가장 집착하고 있는 자들이다.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 - 사랑, 명예, 도덕 등의 무의미한 망상 - 을 찾는 이들에게 고통과 고난의 주는 필히 그들로 하여금 이를 모험하게 하고 아낌없이 내주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보다 아름답게 할 수 없다는 무력과 체념에 찌든 이들에게 현실보다 꿈을 더 사랑한다는 존재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별종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예정된 고난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극도로 주의한다.

왕도의 늦봄 하늘은 전운을 가득 품고 있다. 증오와 증오가 마주쳐 치명적인 충돌만을 야기하는 상황. 거대한 폭풍이 달려드는 상황에서 이 작은 벌레가 무슨 짓을 할 수 있을까? 사무관이 아무리 사고를 현명케 하기 위해 노력해 봐도 그는 자신의 상관인 왕녀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청컨대 이자의 실언에 신경 쓰지 마소서. 무지한 필부의 만용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내 생각과는 좀 다르군.”

생각... 말씀이시죠?”

사무관의 비꼬는 투가 역력한 대답에 왕녀는 나름 웃는다고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지만 어째 얼굴은 굳어 보였다.

리킨스라고 했나? 의로운 순례자여, 내 그대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노라.”

기묘한 분위기에 턱이 얼어붙은 리킨스는 겨우 끄덕였다.

글을 읽을 줄 아나?”

아닙니다.”

대저 글이란 사제님이나 높은 분들만 알아야 하는 것이라 들었다. 굳이 자기 같은 농사꾼들은 글을 알아봐야 하나 도움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타락의 손길에 유혹 당할 것이라는 사제의 저주 섞인 발언이 아니더라도, 일단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 배우는 것도 녹록치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게 농사에 딱히 도움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걸 할 시간에 차라리 짚단이나 더 꼬고 말지.

그래? 그렇다면 기도문 암송은 할 수 있나?”

그렇습니다.”

잘 됐군. 그렇다면 벨로란에서 온 신실한 순례자라면 야만적인 이올라의 찬탈자들과 이교의 무리들이 수도에서 벌이는 악행에 대해 응당 분노할 것이야. 그렇지 않나?”

누레자는 왕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웃는 얼굴로 저런 말을 내뱉는 사람은 둘 중에 하나다. 그냥 악당이거나, 혹은 더 사악한 악당이거나. 리킨스는 손을 내저으며 도리질을 쳤다.

두려워 마라, 내 너를 떠본 것이 아니라 네가 할 일을 알려준 것이다.”

 

둘을 물린 뒤 좀 더 사적인 공간이 되자 사무관은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저하? 생각 좀 하고 사시죠? 그 원리주의자들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위험한 종자들입니다.”

갈라진 교회가 전쟁을 불렀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질서가 무너졌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실수에서 그다지 배운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교회의 역사가 두 세기 전으로 돌아가는 동안 더 잦은 분열을 겪어야만 했으니까. 궁지에 몰린 집단은 언제나 책임질 누군가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류 교단이었던 지라스 파가 몰락하는 동안, 다양한 종파들이 갈라져 나왔다. 그 중 치노트 파는 원래 반세기 전 벨로란 북쪽의 조용한 하사시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사 치노트 베네벤토를 중심으로 청빈과 금욕, 회칙엄수를 내세우며 세력을 키워나갔고, 지금은 젓갈 총대주교로만 알려진 아시포르네 4세 시절에는 인원이 4천에 달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하여 귀족의 뒷받침 없이 당당히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거대 종파가 되었다.

뭐든 자기 편한 데로 해석하는 외골수들이니 말이지?”

왕녀는 턱을 괴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가축과 해수를 가르는 기준은 통제 여부이지 단지 유용해서가 아닙니다. 호랑이를 길들이는 광대들은 있어도 끝내 그것들을 가축으로 기르지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원리주의자들에게 시련이 닥쳐왔을 때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대다수의 교회 구성원들이 그렇듯 이들 또한 현 왕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드러나는 움직임은 없지만 벨로란 같은 북부에서 아직도 종종 세상이 변한지도 모르고 오는 순례자들을 보면, 이들이 조직적으로 여론을 통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지나가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세력이 아직도 건재하다는데 있었다.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들의 부를 교회에 쌓아두고 있었던 반면 이들은 북부 곡창지대에 넓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라스캄 화약 이후 대다수 교회들이 타격을 입었던 것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거둘 세금이 없었다.

레임즈, 호랑이 사냥 해봤어?”

물론 왕녀에게도 나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정치색이 옅고 청빈한 종파로 유명하여 바란 왕자 생전에는 이들이 수도에 지부를 설립하는 것도 허가해줬다. 물론 원리주의자들에게 그런 정도로 호감을 살 일은 없었지만, 최소한 말은 통하겠지.

표범 잡아놓고 호랑이라 자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일에 다른 세력을 끌어들일 거라면 진즉에 까마귀랑 한 약속이나 지키지 그러셨습니까?”

왕국 서부에서 대대로 앙숙이기로 유명한 대영주 둘이 합심하여 반정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부분 강력한 동맹의 징표로 혼인이란 방법이 제기되곤 했다,

그리고 내가 니코트리스 2세가 되고?”

문제는 까마귀가 왕자 암살의 용의선상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올라 있었다는 것이다. 신랑과 집안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것만큼은 묵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화끈한 선택지네요. 역사가들과 음유시인들이 저하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겠군요. 젠장,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고마워, 레임즈.”

사무관이 애써 무시하고는 있지만, 이 여자의 웃는 얼굴은 언제나 그를 곤란하게 했다. 특히 이렇게 가식이 없이 웃을 때에는.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별자리를 헤아린 다음 왕녀를 쳐다봤다.

, 좋습니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건 지금은 팔이 늘어났으니 일은 더 빨리 끝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