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꿈

  꿈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거짓인 것을 아는 데도 불구하고, 가상현실 체험을 하듯 이뤄지고 동시에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 누군가는 반복된 훈련으로 어느 정도 제어가 된다지만, 나는 그런 것이 싫다. 제어가 되는 순간, 꿈은 꿈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꿈은 영화를 보듯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꿈인 것이다. 물론 내게 선택권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런 것이 좋다. 적어도 꿈에 한정했을 때는.

  내가 잠든 것은 새벽 세시가 넘어서, 아마도 챔피언스 리그 8강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각이었다. 물론 이것조차 꿈의 일부일 수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하는 때는 그 다음날 새벽이기 때문이다. 꿈은 깨자마자 바로 그 꿈에 대해 생각하는 그 순간조차 망각되고 변형되며 재조합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삭제. 하지만 같은 꿈을 다시금 꾸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아마 하드디스크처럼 완전한 삭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아니, 이것조차 꿈의 일부인걸까?

  어찌 되었건 간에, 내 꿈은 그렇게 기분 나쁜 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 나는 ‘리그 오브 레전드’ 라는 게임을 가끔 즐기는데, 거기에 나오는 ‘아리’라는 케릭터가 제법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무려, 아내로 나온다. 나의 아내.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서술하자면 제법 길어지지만, 내가 아리를 매우매우매우매우 선호한다는 것은 미리 밝혀둔다. 물론 게임을 즐길 때는 아리를 하지 않는다. 구미호답게 컨트롤하기 매우 어렵다. 그냥 눈요기 감인 것이다.

  꿈의 초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삭제되었으리라. 하지만 괜찮다. 뼈대를 이루는 내용은 기억이 나니까.

  나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나와 싸우고 있는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흐릿했다. 그리고 앵글이 조금씩 다가감에 따라 형체가 점점 안개를 걷어내고 내게 자신을 밝힌다. 아름다운 다리와 풍만한 가슴을 뽐내는 여성이다. 수녀의 성스러운 아름다움과는 상극인, 마치 물과 불만큼 먼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은 그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을 때에도 발휘된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요염(妖艶). 그녀는 몸에 달라붙는 정장과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의 배경은 2차선도로를 낀 상점가였는데, 왜 이런 상황인건지? 나는 생각했다.

  오고가는 대화는 들리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침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말이다. 기억을 조금 되새겨 보니 아리에 대해 뭔가 크게, 정말 크게 실망한 모양이다. 아리는 그것에 대해 실망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 같다. 나는 그것에 대해 더욱 더 화를 내고 아리는 다시 그것에 대해 화를 낸다. 이것의 무한한 반복. 뫼비우스의 띠도 이 보다 더한 것은 없다.

  결국 먼저 지친 내가 그녀를 뒤로 한다. 뒤에서 뭐라고 아리가 소리치는 모양이지만, 기억하려고도 안 했다. 고로 알지 못 한다. 하긴,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아쉬운사람이 찾아오는거지’ 라고 생각하는 모양. 그렇다, 내가 아쉬울 것이 없다. 아니, 실제론 내가 백번이고 양보할테지만, 이건 꿈이니까 내 맘대로 한다. 알아서 찾아오라지.

  “…요.”

  기억나는 건 ‘요’뿐이다. 뭐지? 기억도 참 희한하게 지워졌다. 나는 어느샌가 차에 탔다. 그리고 뒷 자석에 앉아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아마 택시라도 탄 것이겠지. 내 옆에는 커다란 종이봉투에 식재료들이 한가득 담겨져 있다. 하여간 쇼핑은 알아서 해야 한다니까. 설마 이런 것으로 싸운 건 아니겠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핸드폰을 보니 아리의 현재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아니, 정작 아쉬웠던 것은 나였나?

  아리의 위치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내가 차를 타고 이동한지 좀 되자, 갑자기 대쉬 앤 스탑 대쉬 앤 스탑을 반복하며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혼령질주라도 쓰는걸까? ‘그렇겠지’ 라고 속으로 단정한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보며 좋아한다. 입이 헤벌레 해지는 게 아마도 내 쪽이 아쉬웠던 것 같다.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잠시 씬이 바뀐다. 아리가 혼령질주를 쓰는 모습이다. 그런데 마치 이것은, 애니메이션 ‘대운동회’ 26화 14분부터 이어지는 주인공의 질주와 닮아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 떠올라 쓰는 거니까, 실제론 게임 속 혼령질주와 비슷했겠지. 하지만 전자와 후자 둘 다 좋다. 왜냐하면, 정장을 입고 그렇게 뛴다는 건 치마의 한 쪽이든 양사이드든 찢어야 가능하겠지. 흐뭇하군. 하지만 상상의 나래는 다음에 펼쳐야지 더 진행해선 곤란하다. 몽정할 시기는 지났다구.

  나는 계속 흐뭇해한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아리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계속 흐뭇해하며 미소짓는다.

  누군가 눈을 간지럽힌다. 머리맡 창문에서 햇살을 내보내나 보다. 이제 그만 일어날 시간이라고. 이제 꿈에서, 강제로 깬다. 언제나 그렇듯 꿈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의 꿈은 이것으로 끝이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