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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화로운 바다뱀 보급기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오늘도 활기찬 하루가 시작됩니다.


"일조점호 시작! 1분대부터 인원 보고!"


"1분대 인원 보고! 총원 15명! 현재 인원 13명! 열외 인원 2명! 이상 보고 끝!"


"2분대 인원 보고! 총원 17명! 현재 인원 ……"


보급기지 내에 울려퍼지는 우렁찬 외침소리. 보급기지는 신병훈련소를 겸하기 때문에 일조점호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랍니다. 따라서 조금 늦게 일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상나팔 역할을 대신 하고 있죠. 자, 바다뱀 보급기지의 관리관님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우웅…… 벌써 아침인가."


저런, 아직도 이불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군요?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지락거리던 관리관님이 겨우 일어나셨네요. 평소에도 아침에 약한 편이긴 하시지만 오늘따라 유독 일어나기 힘들어해요. 혈압이 조금 낮으신 듯 하네요.

멍한 눈으로 고개를 휙휙 내젓는 관리관님. 흐트러진 반백반흑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춤춥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지요. 안타깝게도 이 모습을 볼 수 있는건 관리관님의 애완동물인 나리와 달래 뿐이랍니다.


"오늘은 식료품 수령이 있었지. 빨리 준비해야겠다."


간신히 이불 밖으로 나온 관리관님의 새하얀 나신이 눈에 들어오네요. 가녀린 뒷모습. 이토록 어린 여자아이가 충각단 동해함대의 모든 보급을 책임지는 기지의 관리관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관리관님은 주섬주섬 상의부터 챙겨 입습니다. 아직까지는 가슴가리개를 할 필요가 없는지 그냥 상의를 걸칩니다. 조금 슬프군요. 옷을 다 챙겨입은 관리관님은 반백반흑의 머리칼을 정성스레 빗어 양갈래로 묶어내렸습니다.


"좋아. 준비 완료. 이제 일하러 가 보실까?"


그녀의 이름은 포화란. 충각단 동해함대 바다뱀 보급기지 기지관리관이랍니다.







포화란은 집무실에 앉아서 내무반장 막소보에게 일조점호 결과를 들었어요. 서류와 실제 인원이 일치하는것을 확인하고 오늘 하루 일과를 부여하는 것은 그녀가 가장 처음 하는 일이랍니다.


"이제 적당히 훈련과정 이수한 신병들이랑 기지병력을 팔할에 이할로 섞어서 선상경계임무 부여해. 걔네들 훈련만 받았지 선상임무는 완전 맹탕일테니까 미리미리 시작하자구. 나중에 함대장들한테 신병교육 이상하게 시켰다는 말 듣기 싫으니까 확실하게 굴려."


"알겠습니다. 다른 훈련병들은 오늘 병과별로 심화훈련이 있습니다만, 참관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나도 업무가 좀 있고 몸이 안좋아서 힘들 것 같네. 그건 훈련조장들한테 일임하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 딱히 지시할 일이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맞다. 지금 정비하러 들어온 전함 그거, 좀 서둘러달라는 연락이 왔더라. 오늘 작업조장들 휴가 없지?"


"예. 양장비, 고량조, 오향 장육 전부 현장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서두르면 오늘 내로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좋아. 포로들이랑 용병들 확실하게 조여. 다른 경계조들 인수인계도 문제 없군. 흐음…… 됐다. 자, 이제 가도 좋아."


"예.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관리관님."


"아아, 수고해. 막소보."


"그럼."


내무반장이자 훈련병들을 담당하는 간부인 막소보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갔어요. 포화란은 그가 두고 간 서류를 마지막으로 최종 확인한 뒤 수결을 함으로서 전날의 업무를 완전히 마무리지었답니다. 이제부터는 오늘의 일인 거지요. 우선 하루일과표에 수결을 한 뒤에 서류철에 끼워넣습니다. 그 외에 오늘 업무를 위해 기반 서류를 작성하는 포화란.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은 강도높은 근무에 속이 상하는 사람이 하나 있네요.


"관리관님! 또 아침 안드시고 일하고 계시죠?"


"아, 이모. 왜 온거야."


보급기지의 주방장인 태장금이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옵니다. 포화란은 그녀에게 볼을 부풀리며 투정을 부리네요. 하지만 태장금에게는 이 귀여운 관리관이 매일 아침을 거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데 잘 먹기라도 해야 잘 클거 아니겠어요?"


"관리관님. 자꾸 그렇게 식사 거르시면 키도 안크고 가슴도 납작할거라구요?"


"아앗! 아침부터 아픈 부분을 건드려! 이모 나빠!"


원숙한 여성인 주방장 태장금은 상당히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지요. 식사시간마다 신병들이 그녀를 훔쳐보느라 국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건 흔한 일이랍니다. 그런 그녀가 포화란에게 지그시 압박을 가하자 포화란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뒤로 뺐어요.


"알았어, 알았어. 내일부터는 꼬박꼬박 챙겨먹을게. 아침에 일어나기 힘드니까 시간내기가 어렵단 말이야. 히잉……."


"어휴. 또 말만 그러시지 마시고요. 그러게 아침을 따로 방으로 가져다드린다고 했는데 왜 자꾸 거절하세요?"


"특별대우는 싫어! 밥을 먹어도 정해진 시간에 식당에 가서 먹을거야! 적어도 부하에게 부끄러운 상관은 되지 않을 거라구!"


포화란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태장금은 어마 하고 한 발 후퇴했어요. 사실 포화란의 태도는 부하된 입장에서 아주 기쁜 일이지만, 그래도 주방을 책임지는 이로서 항상 고된 업무에 시달리며 식사를 거르는 관리관이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지요.


"아이고, 알았어요 관리관님. 그래도 제 정성을 봐서라도 좀 드세요. 이번에 꽤 귀한 게 들어와서 특별히 관리관님을 위해 준비했어요."


"……앗! 이거 교극력이잖아?! 이 귀한 걸 어떻게?"


"외곽 정찰대에서 가가두를 좀 따왔더라구요. 일단 후식삼아 다 쓰긴 했는데 우리 관리관님 드리려고 몇개 아껴놨죠. 이걸 드시면 점심때까진 견딜 만 할 거예요."


"와…… 고마워 이모. 나 때문에 괜히……."


"여기서 감동하면 곤란한데요. 진짜 비밀병기는 따로 있답니다?"


태장금이 등 뒤에 숨긴 쟁반을 앞으로 꺼냈어요. 거기엔 새하얀 밀병과 잔에 담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흑갈색 액체가 올려져 있네요?


"우와아! 가가차! 신난다!"


"후후. 드시고 나서 꼭 양치하셔야해요. 약속하실거죠?"


포화란은 이미 눈 앞의 진미에 태장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침을 꼴깍 삼켰어요. 새하얀 밀병과 새카만 교극력을 겹쳐서 우물거리다 가가차를 한모금 들이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아침 일찍 이것을 마련하느라 수고했을 태장금을 생각하니 다가가던 손이 멈칫 할 수 밖에요.


"고마워, 이모. 매일 이렇게 신경쓰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꼭 밥 챙겨먹을게."


"이번엔 믿어볼게요.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꼭 오세요."


"응. 이모도 고생해. 바로 점심식사 준비하러갈거지?"


"네. 아무튼 엄청나게 먹어대니까요.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특식 지시하신거요.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요? 특별한 날도 아니었는데."


태장금이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자 포화란의 양갈래머리가 움찔 흔들렸어요. 그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애들이 구보하다가 힘들어하니까 좀 잘 먹여둬야겠다 싶어서. 앞으로 더 빡세게 할건데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그런……가요. 이번 기수는 좀 허약한가 보네요. 오늘 저녁은 어인족 구이나 간장조림으로 해봐야겠네요."


"응, 응. 허한 기운 보하는데는 어인족만한게 없지. 맛있게 해둬! 꼭 먹으러 갈게."


"후후,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뵈요 관리관님."


"잘가, 이모."


그렇게 태장금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포화란은 밀병과 교극력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어요. 혀 끝이 녹을듯한 달콤함에 몸을 부르르 떤 포화란은 가가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지요. 지금의 포화란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노라 자신할 수 있었답니다.


"자, 그럼 일어나볼까. 식료품 선박이 올 시간이 얼마 안남았지? 후후. 이모가 어떤 밥을 준비해줄지 기대되는걸."


포화란은 서랍을 주섬주섬 헤집어 완장을 꺼내 오른팔에 끼운 후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이제 본격적인 관리관으로서의 일과가 시작되는군요. 방금 태장금이 말한 점심을 맛있게 먹으려면 열심히 일해야겠죠?


하지만, 그녀가 태장금의 밥을 먹을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답니다…….












포화란은 부두에서 인수인계 절차를 거치고 있었어요. 각지에서 모아들인 식료품들을 확인하고 인수한 뒤 충각단의 이름으로 어음을 끊어주는 것은 관리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입니다. 명색이 보급기지이니 보급품의 관리는 철저해야하지요.


"응, 괜찮네. 질도 좋고 양도 충분해. 20금 정도면 괜찮겠지?"


"에이, 관리관님. 아무리 그래도 저희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


"2.0.금. 정.도.면. 괜.찮.지?"


"예……예이."


무서운 얼굴에서 활짝 웃는 얼굴이 된 포화란이 재빨리 어음에 수결을 하고 찢어내서 선주에게 밀어붙였어요. 아직 어린 나이지만 훌륭한 주부의 패기가 느껴지는 관리관님이시네요.


"자, 다들 이거 하선시켜서 창고로 보내. 이걸로 오전 중에 반입할 물품은 끝난거지?"


"예! 그렇습니다 관리관님!"


"귀 안먹었어. 성량 좀 죽여. 자, 이거 마무리지으면 좀 쉬다가 오전 일과 끝내도 좋아. 마지막까지 긴장 풀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포화란은 반입 업무를 마치고 관리관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이제 관리관실에서 오늘 어음에 대한 결제서류를 만들어 전서구로 보낼 준비를 마치면 오전일과가 끝나는 거네요. 오늘은 꼭 밥을 먹으러 가야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네요. 눈에 익은 걸 보니 꽤나 기지에서 굴러먹은 병사인가봅니다.


"무슨 일이야?"


"관리관님! 큰일입니다! 경천맹의 끄나풀로 보이는 자가 기지 정문으로 침입했습니다! 이미 경비조장 나조귀님이 당하셨습니다!"


"……뭐?"


평화로운 일상은 끝났다. 경계병의 보고가 시작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최대한 저지선을 구축했지만 무서운 실력자들입니다. 고작 시간벌기가 한계입니다. 조치를!"


"수문장 발라라에게 연락해. 당장 정문 폐쇄하고 그놈들 제대로 막으라고 하고. 혹시 모르니까 오분대기조 출동명령 내려. 적어도 여기까진 올 수 없도록 해. 자, 내 관리관패야. 이걸 들이대고 내 지시라고 말하면 다 들을거야. 서둘러!"


"알겠습니다!"


급하게 뛰어가는 병사의 등 뒤. 왠지 모르게 포화란의 가슴 속으로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정문에서 급보! 수문장 발라라님과 보좌관 가두라님, 자바라님 전부 전사하셨습니다! 정문이 돌파당하고 뒤에서 대기하던 오분 대기조들도 전멸했습니다! 현재 적은 무서운 경공으로 부두까지 급속도로 접근중입니다!"


"구간 폐쇄해! 그놈들이 오는 길을 한정시켜! 최대한 꼬아놓으란 말이야! 병력들 전원 전투 준비시키고 준비되는대로 차례차례 전투배치! 훈련한대로 해!"


"그렇게 하면 정비중인 전함으로 길을 여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선박 내부의 인원이 대피하는건 무립니다!"


"우리는 충각단이야! 대피는 무슨! 자리를 지켜! 적이 오면 죽인다! 선박 작업조장들은 제자리 지키고 계속 작업진행하라고 전달해!"


"구역 폐쇄 완료했습니다! 이제 이곳까지 오는 길은 하나 뿐입니다!"



포화란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그녀의 부하는 신뢰할 만한 인재들이었지만, 어인족인 발라라가 그렇게 쉽게 당했다면 안심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날아드는 보고는 전부 비보 뿐이었다.


"급보입니다! 갑판에서 작업중이던 작업조 괴멸! 작업조장 양장비님, 고량조님, 오향 장육님 전부 당했습니다! 현재 적은 선박 안으로 침투중으로 판단됩니다!"


"뭐? 그 길은 식당으로 통하는 길이잖아! 거기 있는 애들은 전투준비가 안되어있을텐데! 다들 뭐하는거야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상당수의 병력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식당에 있을 것이다. 그쪽에는 아직 연락망이 구축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을 모를텐데! 포화란은 이를 악물고 옆에 서 있는 막소보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력편성 끝나는 대로 내무반 쪽 길로 보내! 막소보, 부관들 이끌고 최종방어선 구축을 준비해라.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못한 것 같다. 알겠나?"


"존명. 그럼 지체없이."


"이제 다들 전투준비! 적이 여기까지 침투한 이상 모든 가용전력은 저지선을 구축하라! 전원 전투배치! 적을 섬멸해!"


포화란은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자신 또한 관리관실로 걸어갔다. 혹시 모르지만, 자신의 차례까지 온다면 불벼락을 맛보여주겠노라 다짐하면서.










그녀는 불이 꺼져 어두운 관리관 실 안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들리던 소란스러움이 이제 들리지 않는다. 최후의 연락병은 선박 내부의 초토화, 경비조장 유산슬과 간풍귀, 막소보와 그 부관인 유린귀와 동파윤이 불귀의 객이 되었음을 보고했다. 이제 남은 저지선의 간부는 팔보재와 전가복 뿐. 하지만 그 둘만으로는 여기까지 밀고 들어온 경천맹의 개를 막을 수 없으리라.


"결국 내 차례까지 왔구나."


포화란은 어딘지 쓸쓸한 손길로 나리와 달래를 어루만졌다. 오늘은 꼭 이모가 해 주는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리고 신병들도 모두 죽었다고 했다. 그럼, 그 순진한 녀석들도…….


"용서못해. 그 녀석들의 생사여탈권은 내 거였어. 감히 내 것에 손을 대?"


그녀가 자신의 무기를 꼭 틀어쥐었다. 어둠 속에서도 검은 광택을 흘리는 그 물건은 흡사…….


"후회하게 해 주지. 나리, 달래. 가만히 있어. 좀 있다가 간식 준비해 줄 테니까."


그녀가 무기를 불끈 들어올려 정면을 겨누었다. 그녀가 내공을 일으키자 기계음과 함께 무언가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뇌성벽력이 어둠을 갈라놓았다.


격발음을 넘어선 포성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수십 수백발의 탄환이 관리관실의 두꺼운 문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침내 걸레처럼 변한 정문을 향해 포화란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콰지직!


굉음과 함께 태양 아래로 날아든 포화란.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최신예 병기인 육혈포신 기관총. 그녀의 내공을 탐욕스레 집어삼켜 구동하는 이 괴수를 손에 든 그녀가 침략자를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수는 넷.


"배짱도 좋구나. 감히 여기까지 오다니."


"뭐야? 네년이 여기 대가리냐?"


"그렇다! 내가 충각단 동해함대 바다뱀 보급기지 기지관리관 포화란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아아, 그건 알 필요 없고. 그런데 이거 좀 놀랐는데. 이런 조그만 계집아이가 여기 관리책임자라고? 충각단도 어지간히 인재가 없나보군. 하긴 은광일 그놈을 보면 알 법하지."


"닥쳐라! 주절대려고 이런 짓을 한 건 아닐테지? 네놈들의 목적이 뭐냐!"


"별 거 없고, 그냥 경천맹 양반이 여길 좀 염탐해달라고 부탁하던데 재수없게 들키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우리도 이렇게 난리를 치고 싶진 않았어."


"하! 웃기지도 않는군. 하긴, 나도 멍청하지. 이렇게 이빨 놀릴 시간에 네놈들 머리통에 총탄 하나를 더 박아도 모자랄 판국인데!"


"호오? 자신감이 넘치시는데, 과연 그런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볼까?"


"와라! 불벼락을 뒤집어씌워주지!"


시커먼 사내 넷이 뛰어듦과 동시에 포화란도 묵직한 육혈포신 기관총을 휘둘러갔다. 바다뱀 보급기지의 운명을 건 최후의 전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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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냐!"


포화란이 육혈포신 기관총을 재빠르게 조작했다. 건조한 마찰음이 몇번 울리고 포화란이 원하는 사격태세가 갖추어졌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격발장치를 눌렀다.


퓽-


어딘지 맥빠지는 소리와 함께 시커면 물체가 날아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낙하하는 물체. 경천맹의 주구들은 꽤나 눈치가 빠른지 벌써부터 회피동작에 들아가고 있었지만, 어림없다. 가장 움직임이 느린 역사가 피탄범위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다.


"크흑!"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화염지대가 형성되었다.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작약과 오랜시간 타오르는 특수한 기름을 함께 충진시켜둔 이 유탄은 단 한발로도 일개 분대를 날려버릴 수 있는 특제였다. 포화란은 일단 하나는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직 이 괴한들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윽?!"


철벽으로 몸을 감싸고 포화란에게 달려드는 역사. 여기저기 그을린 모습을 보니 상당한 낭패를 보긴 한 것 같지만 결정타가 되진 못한것 같다. 잠시 놀란 포화란이었지만 이내 태세를 정비하고 육혈포신 기관총을 들이밀었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총신. 역사가 미처 포화란의 지근에 닿기도 전에 포성이 메아리쳤다.


"오호호호호! 죽어라!"


무지막지한 포화가 역사를 덮쳤다. 그의 철벽은 더없이 견고했지만 이정도의 물량공세 앞에서는 종잇장이 불과했다. 마침내 철벽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그녀는 뒷덜미를 자극하는 한기를 느꼈다. 그러고보니, 한 놈이 어느 새 사라져있었다.


"흥! 거기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육혈포신 기관총을 크게 휘둘렀다. 이 묵직한 쇳덩이에 맞으면 역사의 도끼에 직격당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리라. 그녀의 등 뒤까지 접근했던 암살자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몸을 뺐다. 물론 그 사이에 지뢰를 설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펑!


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포화란이 폭연에 집어삼켜졌다. 연기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네 사람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어이, 이봐. 설마 이걸로 끝난 건가?"


"그럴 수도. 이번 지뢰는 내가 생각해도 최고의 위치에서 터졌다."


"긴장 풀지 마라!"


역사가 고함을 내지름과 동시에 검은 연기를 찢어내는 맹수의 발톱이 내달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을 무참히 헤집는 난사. 그것은 이미 격사 하나가 보일 수 있는 파괴가 아니었다. 이 공격만은 괴한들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당한 손해를 허용하고 말았다.


"제기랄! 역사 형씨! 괜찮수?"


"버틸 만하다. 그런데 끝난 게 아닌 것 같군."


그 말 그대로였다. 포화란은 육혈포신 기관총의 탄창 하나를 여기저기 조작해서는 땅바닥에 툭 떨궜다. 이 평범해 보이는 동작이 4인의 등골에 서늘하게 박혀들었다.


"각오해라!"


포화란이 앙칼지게 외치면서 탄창을 내리쳤다. 한순간 섬광이 뻗어나오고는 엄청난 폭발이 주변을 강타했다. 역사는 앞으로 나서며 뒤의 세명에게 외쳤다.


"내 뒤로 와라! 이건 위험하다!"


세명이 허겁지겁 역사의 뒤로 돌아감과 동시에 폭발이 그들을 휩쓸었다. 뜨거운 열풍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며 연기를 날려버렸다.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크흑……, 엄청난 공격이군.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다스려야한다……."


역사는 놀랍게도 그 폭발을 막아내는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육체는 더 이상의 전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급하게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했다. 정신나간 짓이었지만, 이미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영 미덥지 않지만 이 셋을 믿는 수 밖에.


"안심하쇼, 역사 형씨. 슬슬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오는구려."


권사가 목을 꺾으며 포화란을 향해 걸어갔다. 그 느긋해 보이는 움직임에 포화란은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온다고? 어떻게 죽을지 알겠다는 소리구나!"


그녀가 지체없이 기관총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권사의 반응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타하!"


그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포화란이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자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권사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권사의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윽."


강렬한 날아차가가 그녀의 어깨를 강타했다. 어떻게든 방어는 성공했지만, 워낙 체격차가 커서 충격이 만만치 않다. 포화란은 진탕되는 기혈을 다스리며 반격을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열세를 보인다면 머릿수의 차이는 뒤집기가 힘들다!


"에잇!"


날아차기 이후 미처 땅에 발이 닿기도 전에 권사의 눈 앞으로 시커먼 쇳덩이가 날아들었다. 아직 허공에서 운신이 자유로운 경지가 아니었기에 권사는 꼼짝없이 이 일격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떠엉-


"케엑!"


범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권사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포화란은 권사를 향해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아아! 나는 죽지 않아!"


천지를 뒤집는 굉음을 동반하고 쏟아져내리는 파멸적인 호우. 권사는 전력을 다해 몸을 비틀고 권갑으로 탄환을 튕겨냈지만 헛된 몸부림에 불과했다. 급소는 용케 피했지만 엄청난 출혈이 그의 몸을 붉게 물들였다. 이걸로 둘.


"제길! 암살자! 연막을 치고 둘을 지켜라! 일단 내가 저 년을 상대한다!"


지금까지 손놓고 있던 검사가 나섰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어검을 펼쳐내었다. 과연, 원거리에서 검이 날아들자 포화란도 경시할 수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며 검을 떨궈내는 사이 암살자는 쓰러진 두 사람을 모아놓고 연막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유탄 한발이면 해결될 일이지만, 이미 검사가 지척까지 맹습하고 있었다.


"하아!"


치열한 검격. 검사는 철저한 근접박투를 선택했다. 그것도 묵직한 일격이 아닌 가볍게 치고 빠지는 쾌검! 포화란의 공격이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지 않으면 크게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점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것을 모를까? 그녀는 검사를 비웃으며 앙증맞은 앙가슴에서 쌍권총을 꺼내들었다.


"무슨?! 그게 거기서 나올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지!"


쌍권총이 불을 토했다. 검사는 용케 그 공격을 피했지만 낭패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근거리와 원거리를 전부 커버할 수 있는 전천후 격사. 포화란은 그야말로 정진정명한 강자였다. 하지만 검사 또한 온갖 역경을 헤치고 사선을 넘어온 불굴의 무사! 그는 최후까지 활로를 모색했다.


검사의 처절한 혈투. 그는 포화란이 휘두르는 기관총을 막고 쏘아대는 쌍권총의 탄환을 튕겨내며 단속적으로 발사되는 기관총의 사격을 어렵사리 회피했다. 그야말로 칼날 위를 걷는 듣한 몸놀림. 검사가 전력을 쏟아내자 포화란도 그를 일순간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검사는 영악하게도 그녀의 왼편을 집요하게 노렸다. 시야의 사각을 파고드는 공격은 감히 경시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렇게 무정하게 시간이 흘러만 갔다. 마침내 그것이 그녀의 패인이 되었다.


"각오!"


그녀의 발 밑에서 섬뜩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한창 검사와 손속을 나누다 받은 급습은 치명적이었다. 간신히 몸을 틀었지만, 암살자의 소태도는 아쉬워하지 않고 육혈포신 기관총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기관부를 완전히 헤집고 파괴해버렸다. 이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봉인되어버린 것이다.


"제길……."


포화란은 이를 악물고 쌍권총을 재장전했다. 역사와 권사는 이미 운기조식을 마치고 일어나 있었다. 육혈포신 기관총이 있을 때도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는데, 겨우 쌍권총으로 그들을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이를 갈아붙이며 애완동물들을 불렀다.


"얘들아! 도와줘!"


"커허엉!"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포화란의 양 옆으로 뛰어들었다. 4인은 살짝 흠칫했으나, 그 정체가 흑호와 백호임을 파악하고는 그저 비웃음을 흘렸다. 평범한 금수는 아닌 듯 했지만, 그들 또한 온갖 영물들을 상대해온 강자. 겨우 호랑이 따위에게 겁먹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끝낼 때가 온 것 같군, 귀여운 아가씨. 그 예쁜 얼굴에 흠집 나기 싫으면 순순히 총을 내려놓지 그래?"


권사는 겨우 일어날 정도로 회복된 주제에 끝까지 포화란에게 이죽거렸다. 포화란은 그 유들거리는 면상 한복판에 꼭 총탄을 박아주리라 결심했다. 이제 그녀는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패배는 죽음 뿐이다. 그것이 충각단의 명제!


"덤벼라! 나 포화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기개있는 모습, 나쁘지 않군. 그럴수록 꺾는 맛이 각별하거든!"


총성과 고함이 다시금 울려퍼졌다. 절망적인 싸움이 곧 파국을 향해 치달을 것이다. 끝은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