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원아!"

숲의 어둠을 뚫고 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찬수가 천천히 몸을 돌려 진기를 바라보았다.

"자네구먼. 그 아가씨의 애인이."

"누··· 누구세요?"

진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눈앞에 선 작달막한 노인이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두려워 말게. 난 자네 애인을 구하러 온 사람이니까.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잠시 거기서 물러나 있어."

호리병 속 액체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겨우 봉인진을 완성한 찬수는 소녀상을 꺼내 진의 중심에 놓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진기는 조각상을 보자 얼굴색이 노랗게 변했다.

"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진기는 찬수의 멱살을 움켜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이걸 왜 당신이 가지고 있냐고! 해원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별안간 찬수가 그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멍청한 놈! 이러다 니 애인 죽어! 물러나 꼼짝 말고 있어!"

찬수의 단호한 외침과 서슬 퍼런 안광에 놀라 진기는 멱살을 거머쥔 손을 놓았다. 
그는 진기를 무시하고 바랑에서 작은 기름병을 꺼내 곧 소녀상의 머리에 부었다. 검붉은 기름은 흡사 소녀상의 피눈물처럼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진기가 다가서려 하자 찬수는 매섭게 노려보며 그를 제지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 그는 일말의 주저 없이 조각의 머리에 불을 놓았다. 조각상의 머리 위로 그을음이 오르며 불이 붙었다. 

불꽃의 끝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찬수는 그 앞에 착좌하여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가늘게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는 이내 굴뚝의 매연처럼 꾸역꾸역 뿜어져 나왔다. 진기는 연기 속에서 괴로워하는 해원의 환영을 보았다. 진기의 숨이 턱 멎었다.

'해원아!'
마음속 외침이 신음이 되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까맣게 타들어 간 조각의 머리에서 타르처럼 검은 진액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녀상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 액체는 마치 진공청소기에 흡착되듯 찬수가 그려놓은 바닥의 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머리끝에서 막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액체는 바닥으로 끌려내려가는 와중에도 천년송을 향해 꿈틀꿈틀 촉수를 뻗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극음이 전부 나오면, 아이의 영혼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

찬수의 주문은 다급한 마음을 반영하듯 조금씩 빨라졌다. 극음이 봉인진으로 들어갈수록 환영으로 보이는 해원의 표정도 조금씩 편하게 바뀌었다. 진기의 앙다문 입술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해원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때, 찬수가 주문을 멈추고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언제 온 걸까. 쓰러진 그의 등 뒤로 찐득한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진대준 부장 호법이었다. 그는 목을 부자연스럽게 꺾고 눈을 새빨갛게 뒤집은 채 꿈틀거리는 극음을 바라보았다. 진기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느샌가 주변을 둘러싼 안개는 사내의 몽둥이에 덕지덕지 붙은 피떡처럼 검붉게 변해있었다.

"그건 내꺼야..500년을 기다렸다. 내꺼....내꺼.... "

그는 몽둥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조각상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불과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자리에서 멈춰섰다. 팔을 뻗어보려고 안간힘을 쓰자 귀와 코로 덩어리진 피가 왈칵 쏟아졌다. 기다시피 몸을 끌고 가 그의 발목을 움켜잡은 찬수가 부적이 붙은 대바늘을 힘껏 그의 종아리에 꽂았기 때문이다.

"휼 이놈. 네 뜻대로 될성싶으냐?"

'절대 놈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돼···.'
찬수는 가래가 그르렁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꼼짝없이 자리에 붙박여 부르르 떨던 대준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시커먼 휼이 쑥 올라왔다.

'죽은 진 부장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정진이도···'
찬수는 부적과 방울 검을 꺼내 들고 휼을 죽일 듯 노려 보았다.

"내 조급함이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 긴 세월을 기다렸으니 초조할 법도 했지."

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천년송 앞으로 다가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찬수를 바라보며 휼은 천년송 굵은 가지에 손을 올렸다. 
그의 붉은 손이 닿자 천년송은 '타타탁' 소리를 내면서 말라 비틀어졌다. 가지에 듬성듬성 남아있던 솔잎은 누렇게 변색되다못해 새까만 재가 되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둥치와 뿌리는 미라처럼 쪼그라들더니 암벽에서 떨어져 바스러졌다. 

"우우우우우웅-"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극음이 봉인에 꼬리를 묶인 채 일렁대며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휼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찬수에게 눈을 돌렸다.

"네 놈이 살아있는 한 극음을 차지하는 건 쉽지 않겠지? 널 때려죽일 수 있는 젊은 몸...젊은 몸이 필요한데.. "

휼과 찬수의 눈이 동시에 진기를 향했다. 찬수가 탄식했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형체를 흐트러뜨린 휼이 뒷걸음질 치는 진기를 덮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진기의 시야가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불구덩이. 온통 불구덩이. 견딜 수 없게 뜨겁다. 혈관을 타고 펄펄 끓는 기름이 흐른다. 살갗에 닿는 옷이 예리한 면도날처럼 살을 저민다. 아파! 견딜 수가 없어!'

감당할 수 없는 고열에 머리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코와 입으로 뜨거운 김이 피어났다. 진기는 신음하며 옷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괴성은 들짐승의 포효처럼 야만으로 가득했다. 거친 손아귀에 군복 상의가 뜯기고 러닝셔츠가 걸레처럼 찢어져 날아갔다. 분노. 살의가 그를 집어삼킨다.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보이는 것을 철저하게 찢어발기고 싶다. 그의 앞에 찬수가 비틀거리며 섰다.

'해원을 죽이려던 놈이다. 용서할 수 없어.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진기는 성대가 튀어나갈 만큼 고함을 질렀다. 목에서 날카롭게 쇠를 긁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와 뒤범벅된 굵은 땀 줄기가 찬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의 상태로 짐승 같은 진기와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 자신이 비범한 영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다. 감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찬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불타는 조각상을 움켜잡았다.

'아가. 들리나? 저 녀석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다.'

찬수의 절박함이 그의 손을 통해 해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눈에도 괴물이 되어버린 진기의 모습이 보였다.

'진기야! 정신 차려! 진기야 나 해원이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애원하는 해원의 환영에 진기가 주춤거렸다.

'조금 더 힘을 내다오 아가. 조금만···.'

생각이 해원에게 닿기도 전에 찬수는 복부를 찢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뿜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무지막지한 발길질을 날린 후 진기는 피 묻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해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진기는 완벽한 악귀가 되어 찬수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쐐애애애액' 날카롭게 고막을 찢는 소리와 함께 극음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아! 이럴 수가······"

찬수는 넘어진 자신의 등 뒤로 반쯤 뭉개진 봉인진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진으로부터 풀려나온 극음은 미친 듯 형태를 바꾸며 그들 주위를 어지럽게 돌았다. 진기, 아니 휼이 황홀한 표정으로 곧 자신의 일부가 될 극음을 바라보았다.

"아가! 몸으로 들어가 저 녀석을 구해!"

찬수는 눈을 질끈 감고 조각상을 돌바닥에 내리찍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조각상이 두 쪽으로 갈라지자 연기 같은 해원의 혼백이 나타났다.

"부디···. 녀석을."

해원의 혼백은 주저 없이 괴물이 된 진기의 몸으로 쑥 들어갔다. 진기의 몸이 크게 뒤틀리며 휘청했다. 온통 붉고 끈적거리는 피범벅 속에서 해원은 울부짖으며 진기를 불렀다.

"진기야! 정신 차려 제발 진기야!"

혹 진기를 만질 수 있을까.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사방으로 팔을 휘저었다. 뜨겁고 물컹거리는 덩어리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때 핏빛 뻘에서 허연 손이 불쑥 튀어나와 해원의 팔을 움켜잡았다. 

'진기!' 
해원은 그것이 진기의 혼임을 단박에 알았다. 그녀가 물컹이는 핏빛 뻘 속으로 두 팔을 찔러넣고 있는 힘을 다해 당겨 올렸다. 의식을 잃어가던 진기의 영혼이 해원의 팔에 이끌려 나왔다. 붉은 뻘은 마치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처럼 둘을 반대로 당겼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진기는 감전된 사람처럼 눈을 뒤집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피 가래를 뱉으며 찬수가 만신창이 몸을 일으켰다. 부서질 듯 앙다문 입 옆으로 홀쭉한 볼이 씰룩거렸다. 까드득-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에도 언뜻 광기가 비쳤던가.

꼼짝하지 못하는 진기의 등 뒤에 선 그는 왼팔을 뻗어 진기의 어깨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쑤셔 넣어 입안에 차오른 피를 손가락에 흠뻑 묻혔다. 

그리고 진기의 등에 다시 봉인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가 모자라면 다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확신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저 몸뚱이 하나에 500년 된 악령과 살아있는 생령이 둘이 들어가 있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만다. 
부디 이것이 저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술법이 되기를··· 중앙에 진식을 완성하는 큰 점을 찍고 찬수는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사방에서 일어난 돌풍이 진기를 향해 몰아쳤다. 바람이 서로 얽히며 진기의 몸으로 빨려들자 공중에서 소용돌이치던 극음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구슬픈 울음이 귀를 찢는 비명으로 바뀌던 순간, 극음은 나선을 그리며 맹렬한 속도로 진기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갔다. 진기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온몸을 부딪치며 소용돌이치는 극음과, 그것을 잡기 위해 울부짖는 휼. 격류에 휘말려 의식을 잃어가는 해원과 진기. 그야말로 대혼돈이 진기의 몸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격랑 속에서 가공할 속도로 회오리치던 극음은 한 점을 향해 뭉치더니 곧 새빨갛게 달구어진 구슬처럼, 이내 그것조차 삼켜버린 빛으로 변했다. 이윽고 거대하게 팽창하던 빛은 쓰나미처럼 거대한 파동을 일으켜 휼과 해원의 영혼을 진기의 몸 밖으로 밀어냈다. 

주인을 되찾은 몸은 곧 의식을 회복했다. 그제야 눈앞에 선 해원의 영혼이 또렷하게 보였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그는 해원을 바라보며 울고 또 웃었다. 그녀는 이제 편안해 보였다.

'살았어. 진기야. 이제 살았어.'

'해원아 무사해 줘서 정말 고맙다.'

"아가··· 어서 네 몸으로 돌아가.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한다.'

두 사람의 마음속 대화에 찬수의 급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진기가 찬수를 바라봤을 때, 찬수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팔을 떨며 바닥에 떨어진 방울 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힘이 모조리 빠진 손가락은 방울 검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찬수는 바닥에 떨어진 방울 검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았다.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피부가 부풀어 터진 휼이 그들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왔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눈에 복수의 광기만이 이글거렸다. 극으로 치닫는 분노를 보여주듯 그의 영력에 땅이 흔들렸다.

"아가. 이곳을 떠나. 어서!" 

찬수가 해원의 영혼 앞으로 나서며 빈손을 치켜들었다. 
그때였다. 시공을 멈춘 듯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공기중에 떠돌던 티끌도, 바위에 맺혔다 떨어지던 이슬도 정지화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기의 가슴을 뚫고 뻗어져 나온 빛이 휼을 휘감았다. 휼은 빛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게 몸을 뒤틀었지만 한번 몸을 휘감은 빛은 무서운 힘으로 휼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안돼!"

'이건 무슨?'

찬수의 놀란 입으로 침이 흘러 떨어졌다. 휼은 몸이 일그러져 사람의 형태를 잃고 빛이 나오는 진기의 명치끝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안돼. 죽고 싶지 않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형태조차 잃어버린 휼은 자신의 몸을 갈래갈래 찢어 바위며, 나뭇가지며 무엇이든 붙잡아 보려고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그의 촉수는 영체가 아닌 물체를 그러쥐지 못했다.

'어째서 휼이 저 녀석에게로 빨려드는가. 어떻게 소멸의 문이 사람의 몸에서···'
찬수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억울해. 500년이야! 500년을 기다렸는데!"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 한 가닥 남은 촉수가 허공을 후리다가 날아오르던 해원의 발목을 감았다. 해원은 경악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돼··· 안돼! 진기야 살려줘!'

무서운 속도로 해원이 진기의 가슴을 향해 끌려들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빛 진기의 망막에 바늘처럼 날아와 박혔다.

"해원아!"

자신의 가슴으로 빨려드는 해원을 붙잡으려고 그는 손을 뻗었다. 휼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인 그가 영체인 해원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몸은 연기처럼 손을 통과하여 가슴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돼! 안돼! 안돼! 해원아!"

진기는 미친 듯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어떻게 좀 해봐! 제발! 제발요!"

진기는 죽일 듯 찬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부서져라 때렸다. 
하지만 찬수는 무릎을 꿇은 채 그 광경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흙바닥을 뒹굴며 발광을 하던 진기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에필로그]


오치연의 일기 중.

어쨌든, 우리는 휼을 사멸시키고, 극음을 봉인 하는데 성공했다. 
진대준 부장 호법과 한대수 호법이 이번 일로 목숨을 잃었다. 정진이는 휼에게 빙의된 대준 부장의 급습을 받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한동안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다.
호법의 자리는 새롭게 천명을 받는 이들로 대체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진기라는 청년. 해원이라는 여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휼은 우리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고, 우리는 그를 쫓아 가평의 야산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대호법을 알고 지낸 지 여러 해가 됐지만, 그렇게 넋이 나간 어른의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대호법의 부상도 심각했다. 자연스럽게 뒷수습은 곽 교수님과 내가 맡았다. 진기라는 청년은 근무지 이탈로 헌병대에 인계되었으나, 우리의 적극적 변호와 해명으로 3주 후 무사히 제대했다. 찬수 대호법에게 원한을 품은 대준 부장이 인적 드문 가평 야산으로 유인하여 정진을 때려눕히고 대호법을 살해하려 할 때, 비명을 들었던 당시 당직 근무자 추진기 병장이 달려와 대호법을 구한 것으로 즉석에서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졸지에 대준 부장 호법은 살인자가 되었다. 두 분 호법의 제를 정성껏 올렸지만, 우리만 살아남았다는 자책은 지우기가 힘들다. 지켜드리지 못한 우리의 사죄를 그곳에서라도 평소같이 호탕한 웃음으로 받아주시길···

해원이란 아이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의식을 잃은 채 119에 실려 갔고, 아직까지 코마 상태에 빠져있다.  내가 찾아갔을 때, 병실을 지키던 사람은 그녀의 남동생 혼자였다. 해원 남매는 수 년 전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고 한다.

어떻게 수소문을 했는지, 며칠 전 진기가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찬수 대호법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제대 후 곧바로 해원의 중환자실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면 안정적이던 그녀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몇 번을 다시 찾아갔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접근이 그녀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울부짖는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는다고 한다. 진기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했을 것이고, 그 중심에 대호법이 있으니 그가 대호법님을 찾을 이유는 충분했다.

어제, 진기를 데리고 대호법이 계신 산채를 찾았다. 대호법께서는 진기를 보자마자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고, 진기는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진기는 대호법이 들려준 그 날의 일을 그대로 이해했을까.

대호법이 진기의 등에 피로 봉인진을 그린 것은, 최후까지도 극음을 휼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지가 만들어 낸 행동이었다. 극음만 사라지고 나면 기력을 소진한 휼과 함께 최후를 맞으실 계산이셨던 것 같다. 그게 두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을 테니까.

우리가, 그리고 진기 자신도 몰랐던 것은, 그가 매우 희귀한 진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진양의 기운은 말 그대로 순정의 양기를 말한다. 그와 상극이 되는 극음이 진법에 힘으로 그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 양극은 그 안에서 혼돈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공을 뒤트는 빅뱅을 일으켜 몸 안에 블랙홀 같은 소멸의 문을 만들어냈을 거라고 추측한다. 휼이 빨려 들어가 사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자를 소멸로 인도하는 지옥문은 신속하게 닫히게 마련이다. 휼이 사멸된 시점에서 지옥문은 닫히고 영구히 사라졌어야 한다. 휼이 최후의 발악으로 해원이란 아이의 생령을 지옥 문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명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있다. 생령이 들어간 지옥문은 진기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휴지기를 맞은 화산처럼 다음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든 사령이 나타나면 무시무시한 지옥문의 아가리를 벌리기 위해서.

여기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만약 병원에 있는 해원의 신체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사령으로 변한 그녀의 영혼이 소멸하고 지옥문은 닫힐 것이다. 단지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 뿐인데 진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른 한 가지, 만약 그가 해원을 지옥문에서 꺼낼 수 있다면? 어쩌면 두사람 모두를 살리고, 지옥문을 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 아이의 영혼을 지옥문에서 데리고 나온단 말인가.

아무도 방법을 모르는 그 길을, 진기는 어린아이 떼쓰듯 무조건 그 길을 찾겠다고 찬수 어르신께 말했다. 자책의 무거운 족쇄 앞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대호법도, 그리고 진기라는 그 청년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시간은 흐르고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뿐. 다만 하늘과 순리의 길을 믿고 그 의지에 따라 한 걸음을 앞으로 나갈 뿐.

2012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