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늦은 저녁으로 먹었던 샌드위치가 얹힌 걸까?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금방 지나갈 가벼운 불쾌감으로 여기고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리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냉수로 속을 달래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선 순간 그녀는 비틀거리며 가벼운 어지럼을 느꼈다.

빈혈인가? 시야가 어두워지고 가끔 방이 일그러져 보이기도 했다.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간 그녀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마셨다.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더니 이내 오싹한 한기와 함께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마치 냉동 컨테이너 안에 들어온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입으로 하얀 김이 솟았다.

'뭐야. 왜 이렇게 춥지? 에어컨을 틀었었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고개를 돌려 벽에 고정된 에어컨에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낯선 불쾌감이 바닥의 냉기와 함께 뒤꿈치를 타고 올라온다. 그녀는 몸을 떨며 침대를 향해 종종걸음쳤다.  하지만 몇 걸음 못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침대 옆에 장식장에 놓여있던 소녀상. 그것은 얼마 전 진기를 면회 갔을 때 받았던 선물이다. 조각을 전공한 그가 반년을 공들여 깎았다는, 프로포즈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까지 붉어지며 건넨 소중한 선물. 그 소녀상이 전지로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다다다닥 소리를 내면서 선반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순간 천정의 네 귀퉁이에서 역청 같은 어둠이 조각상을 향해 촉수를 뻗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조각을 향해 움직일 때마다 마치 공간이 딸려오듯 천장과 벽이 심하게 뒤틀렸다. 해원은 너무 놀라 새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수중의 외침처럼 비명은 공중에서 둔하게 맴돌다가 극음이 만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왔구나!" 

찬수는 불붙인 부적을 봉인진 가운데 던졌다. 
부적의 불길이 진의 중심에서 '퍽' 꺼지며 복도의 시공을 순간 멈추었다. 떠돌던 먼지도 허공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가 싶더니, 곧 맹렬한 바람이 복도 양쪽에서 찬수가 우뚝 선 곳으로 몰아쳤다. 소녀상을 목전에 두고 검은 촉수가 바르르 떨며 나아가지 못했다. 

천장에 뭉쳐있던 극음의 한쪽 귀퉁이가 엿가락처럼 늘어나더니 현관문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찬수가 공력을 끌어모아 진법에 힘을 가하자 극음의 일부가 현관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그 시커먼 몸 일부를 드러냈다. 그는 맨손으로 숯덩이를 집어 화로에 던지듯 극음의 꼬리를 잡아 봉인진의 복판에 내리꽂았다. 꼬리가 물린 극음은 전기에 감전된 부르르 떨더니 곧 무서운 속도로 진법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해원의 오피스텔 안은 그야말로 혼돈의 한복판과 같았다. 극음은 문밖으로 당겨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수십 개의 촉수를 뻗어 사방을 붙들었다. 힘을 못 받는 물건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날렸다. 서랍장이 쓰러지고 해원의 머리 위로 날아간 의자와 토스터가 벽에 부딪혀 부서졌다. 깨진 유리와 플라스틱 파편이 방향을 가리지 않고 날아다녔다. 해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그때 홑실 같던 촉수 한 가닥이 소녀상의 머리에 닿았다. 마침내 영물과 접촉한 극음은 탈출구를 발견한 뱀처럼 꾸역꾸역 소녀상 안으로 제 몸을 구겨 넣었다. 봇물 터지듯 빨려 나오던 극음이 움직이지 않자 찬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급히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거기! 괜찮은가? 아가씨 내 말 들려?"

찬수의 외침을 들은 해원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노인이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정신을 차리고 현관으로 달려나가던 그녀는 극음이 뀸틀꿈틀 들어가고 있던 소녀상을 보았다. 
'진기의 소중한 선물… ' 
그녀는 소녀상을 움켜쥐고 힘껏 당겼지만 무지막지한 극음의 요동에 몸이 휘청거렸다. 찬수는 전신의 기를 손끝에 집중하여 봉인진에 다시 힘을 실었다. 멈추었던 모터가 돌아가듯 다시 극음이 뒤틀리며 조금씩 진법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법이 강력한 힘으로 극음을 끌어당기자 소녀상은 해원의 손에서 벗어나 그대로 현관문으로 날아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기기기기긱' 문 밖에서 당기는 힘에 소녀상은 곧 바스러질 것처럼 떨었다.

같은 시각, 광우는 오피스텔을 향해 바쁘게 발을 놀렸다. 2시 정각 교대를 해야 하는데 늑장을 부리다가 15분이나 늦어버린 것이다.

'박 씨 아저씨 화가 많이 났을 텐데… '

그는 유리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박씨는 보이지 않았다. 경비 완장이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저씨도 참…. 그걸 못 기다리고 벌써 가신 건가?'

오피스텔 정문은 잠겨있다.

'그런데 로비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지?'

광우는 얼굴을 바짝 대고 로비를 훑었다. 주먹으로 유리문을 몇 차례 두드렸지만, 바닥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중년의 사내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가끔 몸을 부르르 떠는 게 잠든 것 같지 않았다.

"이봐요. 거기 누구요?"

광우는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경비실 서랍에 있을 현관 열쇠가 주머니 안에 있을 리 만무했다.

'아! 탕비실.'

경비복을 환복하는 탕비실은 지하에 있다. 다행히 지하로 통하는 비상문의 열쇠는 허리에 걸린 열쇠뭉치 사이에 섞여 있었다. 광우가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마찬가지로 정좌를 하고 가수면상태에 빠진 오치연 호법을 발견했다. 그녀 역시 광우가 다가오는데도 가끔 몸을 가볍게 떨 뿐 눈을 뜨지 않았다.

'뭐야. 이 사람들은?'

광우는 해괴한 광경에 등골이 오싹했다. 한시라도 빨리 경비실로 들어가 경비업체를 호출하는 게 좋겠다. 그는 오치연을 지나쳐 비상문이 있는 건물 뒤로 달려갔다.
이번엔 두 명이다. 한 사람은 벽을 등진 채 정좌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까? 그의 시커먼 뒷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게다가 갑자기 내려앉은 붉은 안개는 무엇인가.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등을 보이고 선 정체불명의 사내는 식은땀을 흘리는 한대수 호법의 머리를 짚으려고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한대수 호법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그 얄팍한 간격 사이로 둘의 기운이 맹렬하게 부딪치고 있는 것을 광우는 보지 못했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요?"

광우는 용기를 쥐어짜 그들에게 소리쳤다. 시커먼 사내가 광우를 향해 등을 돌리는 찰나 한대수 호법이 번쩍 눈을 떴다.

"이봐. 도망쳐 당장!"

"뭐요?"

핏빛 붉은 눈의 휼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광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메두사의 눈을 보면 몸이 돌처럼 굳는 게 마력이 아닌 극강의 공포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휼의 눈이 번뜩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번엔 공포가 아니라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전신에 마비가 왔기 때문이다. 

한대수 호법은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휼의 등을 향해 던졌다. 구슬이 휼의 등에서 깨지며 화염이 솟았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송장이 타는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휼은 살갗이 타들어 가는데도 광무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환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진액이 타오르던 불씨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광우의 마비된 입으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맛깔스러운 생령이군….하지만 지금은 허기를 달랠 때가 아니라 여길 뚫고 들어갈 몸뚱이가 필요하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의미를 새겨 볼 겨를도 없이 광우의 눈이 홱 돌아갔다. 휼은 그대로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격하게 사지를 떨던 광우는 붉어진 눈으로 시야를 회복했다.

"이 사악한 놈. 당장 그 몸에서 나가지 못해!"

한대수 호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에 숨겼던 대나무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휼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뿌렸다. 휼은 날아오던 검을 손으로 잡았다. 칼날 움켜쥔 손으로 시커먼 연기가 피시식 일어났다. 영검을 맨손으로 견디는 휼을 바라보며 그는 길게 탄식했다.

"기껏 이 정도 기력으로 날 잡으려 했던 건가."

휼은 팔을 뻗어 한대수의 목줄을 움켜잡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손아귀에 매달린 그의 몸이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숨이 막혀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대로는 일 분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보다… 휼에게 몸을 빼앗긴 청년의 혼이 구천으로 날아가려 한다.

'젊은 놈은 살아야지….'

한대수 호법은 흐려지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품에 숨겨둔 대바늘을 더듬었다. 휼이 낌새를 눈치챘을 때 그는 마수의 가슴 한복판에 그것을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동시에 휼이 손목을 비틀자 한대수의 목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90도로 꺾였다. 휼은 그를 바닥에 내던지고 찡그린 얼굴로 가슴에 박힌 바늘을 뽑았다. 바늘은 뽑혔지만 찔렸던 자리에 반딧불이처럼 희미한 빛이 머물렀다. 오열하며 하늘로 흩어지려던 광우의 혼령이 빛을 쫓아 내려왔다.

"영리한 놈. 서둘러야겠군"

휼은 비상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섰다. 결계의 기운 때문인지 휼, 아니 광우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순간 모든 호법이 눈을 번쩍 떴다.

"결계의 한쪽이 무너졌다!"

'당황하지 말고 자릴 지켜! 결계가 완전히 깨진 건 아니다. 모두 더 정신과 기를 집중해.'

머리를 울리던 목소리는 진대준 부장의 것이었다. 동요하던 호법들은 다시 정좌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계단을 내려가던 휼은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뒤로 몸을 되찾으려는 광우의 혼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어두운 지하실 휼의 눈에 결가부좌를 튼 진대준 부장 호법이 들어왔다. 휼은 지하실에 비치된 소화기를 들고 진대준의 등 뒤로 걸어갔다. 

강력한 귀기를 느낀 진 부장은 등을 보인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식은땀이 턱을 타고 결계를 맺은 손 위로 떨어졌다. 그는 휼이 눈치채지 못하게 안주머니에서 황동의 금강저를 꺼내 들었다. 휼이 소화기를 번쩍 들어 올렸을 때, 먼저 몸을 돌린 진 부장이 사력을 다해 휼의 배를 찔렀다.

"크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지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잡았다! 내가 휼을 잡았다. 아? 아뿔싸….'

진대준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휼이 사람의 몸에 빙의된 사실을 몰랐다. 고통에 드러난 시뻘건 휼의 송곳니를 보는 순간, 묵직한 소화기가 그의 정수리에 무섭게 내리꽂혔다. 진대준은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박으며 쓰러졌다. 휼도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몸을 사납게 뒤틀었다. 귀청을 찢을듯한 비명을 지르며 휼이 광우의 몸에서 튀어 올랐다.

허공을 맴돌던 광우의 혼이 자신의 몸을 들어갔다. 곧 의식이 돌아온 그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배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휼 역시 복부에 시뻘건 숯불 같은 상흔히 남았다.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졌지만, 그것은 명백한 미소였다. 수맥을 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결계가 완전히 깨졌다….'

힘겹게 극음과 줄다리기를 하던 찬수는 가슴 한복판이 서늘해졌다.

'진 부장이… '

생각이 잠깐 흐트러지자 봉인진으로 빨려들던 극음이 역류했다. 찬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갈래 치는 생각을 털어내고 정신을 극음에게 쏟았다. 해원은 문으로 다가가 자석처럼 달라붙은 소녀상을 잡아당겼다. 이번엔 조각상이 당기는 방향으로 조금 딸려왔다. 해원은 한쪽 팔로 조각상을 감아 당기며 현관문을 열었다. 
왈칵 문이 열리자 바닥에 꼬리를 물고 요동을 치는 시커먼 극음의 전신이 드러났다. 그 앞에서 사투를 벌이던 찬수가 극음이 노리는 것이 조각상임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버럭 소리쳤다.

"아가! 얼른 그 조각상을 깨뜨려!"

'진기의 소중한 선물을 박살 내라고?'
해원은 멈칫했다.

'하지만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
찬수의 결기 어린 눈빛에 압도되어 해원은 두 팔로 조각상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때 찬수의 입으로 짓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해원에게 머물던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너머 어둠으로 날아가 박혔다. 해원은 소름. 차가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목덜미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아가! 얼른 던져!"

하지만 그녀는 반사적으로 찬수가 바라보던 자신의 뒤편으로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자욱한 핏빛 안개를 헤치고 시커먼 형상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휼이었다. 끈끈하고 검붉은 진액이 시커먼 얼굴과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고 일부는 중력을 잃은 듯 방울져 공중을 떠돌았다. 그가 몰고 온 피 안개가 온 건물에 자욱했다. 몸은 둔해지고 의식은 몽롱했다. 
이 소동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필시 이곳을 뒤덮은 피 안개 때문이리라. 찬수는 60년 전 휼을 처음 보았던 공포감이 자신의 몸을 옥죄는 것을 느꼈다.

"휼. 이노옴!"

격노한 찬수의 포효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엄포라기보다 두려움을 떨치려는 결기였다. 그의 마음을 읽은 걸까. 휼의 표정이 웃는 듯 보였다.

"그래. 기억이 나. 너는 그때의 그 꼬맹이던가?"

"우리가 존재하는 한 너는 결코 극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휼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해원이 선 자리에서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이 허옇게 돌아갔다.

'아차!' 

해원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찬수가 손 쓸 틈도 없이 해원은 조각상을 들어 올린 그대로 돌처럼 굳어갔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괴상한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사지를 꼼짝할 수 없더니 몸속으로 수만 마리의 실지렁이들이 꿈틀거림을 느꼈다. 일순 자신을 지탱하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더니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휼의 손가락을 따라 해원의 몸에서 그녀의 혼백이 천천히 딸려 나왔다. 산 사람의 생기를 빨아들여 기력을 회복하고 동시에 찬수의 주의를 흩트려놓을 놈의 영악한 술수였다. 허공에서 뻣뻣하게 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해원은 그제야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영혼의 절규는 실제 육성을 만들지 못했다.

'아가. 흰 연기를 붙잡아. 그래야 네가 산다!'

찬수가 소리친 걸까. 아니 그의 입은 굳게 닫혀있다.
찬수는 재빨리 꺼내든 붉은 부적에 불을 붙여 혼이 빠져나가는 해원의 머리 위로 던졌다. 부적은 잠깐 불꽃을 일으키고 꺼지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아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올렸다.

'흰 연기!'

해원은 휼에게로 끌려가면서도 찬수가 마음으로 전한 말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힘을 다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연기 한 가닥을 움켜잡았다. 흰 연기는 해원의 손에 닿자 마치 뱀처럼 미끄러지듯 팔을 감아 돌며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겨우 한 뼘을 앞에 두고 더 끌려오지 않는 혼을 잡기 위해 휼은 안간힘을 썼다. 연기를 조종하는 찬수의 팔에도 꿈틀거리는 힘줄이 돋아 올랐다.

"쓸데 없는 짓 마라 휼. 이번엔 반드시 네놈을 잡는다."

어금니를 악무는 찬수를 차갑게 바라보며 휼이 말했다.

"네놈이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너부터 없애지 않으면 극음을 온전히 차지하긴 힘들겠지."

휼이 찬수를 향해 양손을 쭉 뻗자 그의 몸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일제히 찬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찬수가 허리춤의 부채를 꺼내 커다란 원을 그리자 핏방울은 부채가 그린 원을 따라 벽과 천장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부채의 반경에서 벗어난 핏방울이 신발과 바짓단에 구멍을 뚫었다. 찬수는 타들어 가는 자신의 살 냄새를 맡았다. 
방어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역공을 위해 부채를 쥔 손으로 기를 모으자, 봉인진이 느슨해지며 극음이 다시 소녀상으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상황은 절박했다. 이번엔 휼이 왼손을 뻗어 극음의 촉수 한 가닥을 잡았다.

'안돼! 이러다간 극음이 휼에게 빨려 들어간다!'

계단으로 호법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도착해도 휼이 극음을 흡수한 후라면…. 모든 게 끝장이다. 살육이 난무할 것이다. 그때 그의 머리로 번쩍 섬광이 지나갔다. 찬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문양을 휘갈긴 후 주먹을 가슴 위로 교차시켰다. 그리고 주저 없이 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해원의 혼에게 소리쳤다. 이번엔 육성이었다.

"아가! 조각상으로 들어가! 어서!"

말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 찬수와 휼이 불꽃을 바지직 일으키며 거세게 충돌했고 반대방향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해원은 찬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조각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녀를 품은 흰 연기가 극음과 섞이며 스르르 조각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놈! 무슨 수작이냐!"

휼의 포효에 복도의 유리창이 모두 박살이 났다. 사납게 달려들어 다시 극음을 움켜쥐려는 찰나 찬수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죽어도 네놈 손에 들어가게 둘 순 없다."

찬수가 자신의 발로 봉인진을 뭉개버리자, 묶였던 극음의 꼬리가 풀리며 쏜살같이 조각상 안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화석 같던 해원의 몸도 힘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각상은 바닥을 굴러 찬수의 발치에 닿았다.

"으아아아아아!"

눈앞에서 목표를 빼앗긴 휼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몸의 사방이 비죽비죽 날카로운 가시가 솟구쳐 올랐다. 찬수는 소녀상을 품은 채 쓰러진 해원의 앞으로 나가 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고한 이 아이는 지켜야 한다. 하지만….'

휼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시시각각 뻗어오는 날카로운 가시가 찬수의 몸을 찌르기 직전, '쇳' 소리와 함께 진성살이 날아와 휼의 몸을 때렸다. 휼은 뻗쳤던 가시들을 몸으로 거두며 비틀거렸다. 찬수의 등 뒤로 다섯 호법이 각자의 무구를 꼬나쥐고 섰다.

"성님 괜찮으십니까?"

"극음은? 봉인에 성공했어요?"

"영물 안으로 들어갔네…"
찬수가 가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늦은 건가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이 안에 사람의 생령이 함께 들어있네."

 "아니 어떻게…"

"생령이 있는 동안 극음은 온전히 영물을 차지할 수 없네. 하지만 아이의 생명도 위험해. 이 아이를 살리려면 서둘러야 해. 자네들이 휼을 막아. 나는 곧장 아이를 구하러 가야겠네."

"알겠습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가십시오!"

"부디 목숨을 보전하시게. 무모해선 안 되네."

"저는 대호법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정진이었다.

분노한 휼의 포효가 건물을 흔들었다.
찬수는 정진과 함께 서둘러 계단으로 달렸다. 그사이 네 호법은 각자의 주술과 무구로 휼을 505호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