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음기가 서로 뭉쳐 강건해지면 만물은 숨을 죽인다. 

자리를 잃고 떠돌던 세상의 음기가 때를 만나 거대한 극음을 이루게 되면 사람이 아닌 것들이 요동을 친다.

극음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 성했다가 사그라지는 것이 순리지만, 사심이 깃들어 순리를 따르지 못했던바. 존속의 의지가 생긴 극음은 어느 때나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것이 영물에 들러붙고, 저주받은 원귀에 흡수되어 일어났던 재난과 변고를 기억하는가. 극음을 가두지 못해 치렀던 수많은 희생을 우리는 대를 이어가며 뼛속으로 새기고 또 새겼다.

 

후법들이여. 우리 대에 융성했던 극음은 우리가 소멸시켰지만, 극음을 탐하던 마물 휼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다. 수백 년, 누대에 걸쳐 강성기마다 극음을 노리는 악령이 없었던 적 없지만, 휼만큼 강대한 원귀는 유래가 없었다. 8인의 호법 중 넷이 휼에게 넋을 잃었고 남은 넷도 겨우 목숨만 건졌을 뿐이다.

 

60년 후 돌아오는 8 환갑은 500년을 주기로 극음이 초강성기를 맞는 해가 된다. 

원대해진 극음을 가두어 소멸시키는 것 만으로도 그대들은 진력하게 될 터. 허나 휼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고, 후법들은 놈과의 사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에게 위기를 넘겨주는 것이 면구스러운 일이지만 명심 또 명심해야 할 일이기에 이렇게 기록으로 간절한 당부를 전한다. 

 

극음을 가두지 못 하는 일이 있어도, 휼을 사멸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휼이 극음을 얻는 일만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놈이 극음을 얻게 되는 날 세상을 지탱하던 순리가 뒤집히고 사자가 날뛰는 세상이 올 것이다. 

 

반드시 놈을 막아 세상을 구하길 간곡하게 당부한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명예와 재물이 따르는 일도 아니지만, 후법들이여. 자긍심을 가져라. 우리는 천지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이며, 순리를 벗어난 그릇됨과 부자연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왔고, 또 지켜나갈 유일한 존재들임을 잊지 말길. 

그대들이 올바름을 지키고 우뚝 설 수 있도록 우리는 저 너머에서 그대들에게 미력을 보태겠네.

 

 

 

호프집 출입문에 달린 방울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구찬수는 입구 쪽을 힐끗 바라보고 낡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한무리의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자리의 찬 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찬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테이블 좌우로 흩어져 앉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은 자리에 모여 앉은 호법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떤 모임의 사람들인지 그들의 행색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가장 지긋한 구찬수(72세 대호법)와 김선재 부장호법(64세-무속인)는 한복차림이었고 찬수의 오른쪽에 앉은 덩치가 산만 한 진대준 부장 호법(55세-목수)은 짙은 남색의 오래된 건설사 점퍼를 입고 있었다. 

좌측으로는 말끔한 양복 차림의 곽종운 호법(45세 -교수)과 오치연 호법(33세 여-변호사)이, 그들의 맞은편으로 부랑아 행색의 한대수 호법(46세-무직)과 평범한 동네 아줌마처럼 보이는 남이연 호법(38세 여 -무당) 그리고 챙이 편편한 야구모자와 번쩍이는 금붙이를 목에 두른 이정진 호법(29세- 인디 래퍼)이 자리했다.

 

"찬수어른 쎈스 있으시네. 모임 장소가 치맥 집이라니 흐흐흐"

 

무거운 분위기를 희석 시키려고 진대준이 걸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 부장 착각허지 말어. 근처에 요기할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그런 거지. 일을 끝낼 때까지 술 한 모금 마실 생각 마시게."

 

"아휴. 맥주가 무슨 술이라고.."

 

"다들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들 하고 오셨는가?"

 

"마음은 몇 주 전부터 단단히 먹었는데도 솔직히 겁이 나네요."

 

긴장감에 목이 타는지 남이연 호법은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님이 가운데 떡 버티고 계신 데,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김선재 부장 호법이 남이연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던진 말이었지만, 남이연과 같은 무속인으로서 이번 일의 무게를 잘 아는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번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인 거죠? 보내주신 선대 호법의 그 편지 말입니다. 휼이란 놈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너무 겁먹지 마라. 우리가 함께 귀신을 잡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휼이 제아무리 센 놈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덟인데 설마 한 놈을 상대 못 하겠어?"

 

부랑아 꼴의 한대수 호법이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언성을 높였다.

 

"놈은 다르네. 60년 전이니 내가 12살 무렵이었을게야··· 선대 호법님들이 놈과 겨루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았네. 이후 이날까지 나도 수많은 악령과 싸워 왔네만, 그놈처럼 강한 놈은 본 적이 없어. 

선대 호법님들의 분투로 놈도 온전치는 않겠지만, 그렇기에 이번 초강성기의 극음을 얻어 완전체가 되려는 놈의 시도는 필사적일 거야."

 

"완전체라면?"

 

"신이 되려는 게지. 그게 그놈이 500여 년을 기다린 이유일 테니까."

 

"신이라···. 만약 놈이 극음을 차지한다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겠네요."

 

오치연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미간의 주름을 접었다.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치킨은 테이블 위에서 뻣뻣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진대준과 한대수만 치킨 한 조각씩을 집어 먹었을 뿐 나머지들은 곰곰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극음이 나타나는 날이 보름인 오늘인데···. 어느 곳으로 깃들게 될지 장소는 찾으셨습니까?"

 

"요 앞에 오피스텔이 하나가 있어. 음기가 운행하는 형상을 쫓아 지난 사흘간 쫓아온 곳이네. 정진이를 시켜 위치를 확인해 보니, 505호쯤 되는 거 같은데. 여대생 하나가 산다고 하더군. 아마 그 집에 극음이 깃들고픈 영물이 있는 모양이야."

 

"우편함을 통해 이름을 확인해봤는데, 은해원이라는 사람이에요. 저도 아직 만나보진 못했어요."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아이를 설득해서 물건을 받아내면 되는데···."

 

"쉽지 않겠네요. 이 상황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일단은 부딪쳐보세."

 

찬수와 호법들은 10시가 돼서야 호프집을 나와 그가 말한 오피스텔 건물을 향한 경사로를 따라 걸었다. 늦은 시각 큰 도로에서 한 블록 벗어난 건물 주변은 인적이 드물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밤 풍경이었지만, 결전을 앞둔 그들 앞에 나타난 직육면체 건물은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보였다. 그들은 건물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 앞에 모였다.

 

"505호에 불이 꺼진 걸로 보아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음··· "

 

찬수는 걱정스럽게 불 꺼진 5층과 보름달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호법들에게 돌렸다.

 

"다시 당부하건데 자기 위치를 확실하게 지켜야 해. 곽종운 호법이 동쪽, 정문을 맡고, 오치연호법과 남이연 호법이 왼쪽과 오른쪽을. 한대수 호법은 후문이야. 사방진을 치고 그 자리를 지켜 극음을  완전 사멸시킬 때까지 휼이 건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알겠지? 

 

그리고 선재 부장과 대준 부장은 나와 함께 5층으로 올라가고, 정진이는 만일의 공백을 대비해서 여기서 머문다. 정신목은 잘 가지고 있지?"

 

만일의 공백이란 말이 호법들 사이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는지 잠시의 침묵 동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정진은 초조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향나무 조각을 단단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법들이 만든 방어진은 극음을 탐하여 몰려드는 온갖 악귀와 악령들을 봉쇄하기 위함이지만, 무엇보다 휼의 접근을 막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평소라면 봉인진은 한 사람의 호법만으로도 충분히 그 위력을 발휘하지만 찬수가 네 명의 뛰어난 호법을 사방으로 배치한 데는 휼에 대한 경계가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계가 깨지지 않게 지켜야 하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어이 당신들. 거기 모여서 뭐 하는 거요?"

 

오피스텔의 경비원이었다. 한 무리의 낯선 이들이 모여있자 불안했는지 50대 깡마른 경비원이 긴장한 -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 우리들은 ···"

 

돌발 상황을 수습하는데 항상 앞장을 서는 곽종운 호법이 나셨지만, 둘러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자 경비는 한층 더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의 면면을 훑었다.

 

"자네··· 아들을 먼저 보냈구먼. 딸은 장애가 있고···"

 

곽종문을 물리고 앞으로 나서는 구찬수의 말에 경비는 입을 떡 벌어졌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당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난 대한 무속인 협회장 박무속이라고 하네. 자네 요즘 어깨가 많이 무겁지 않던가?"

 

"무속인 협회?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십니까?"

 

목소리 톤이 순종적으로 바뀐 경비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했다.

 

"살이 끼어서 그래 살이. 그나저나 자네 얼마 못 살겠구먼. 쯧쯧."

 

"네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야. 여기 터가 매우 불길해. 급사하고 싶지 않으면 경비일 관두는 게 좋을 것 같네."

 

찬수의 말에 경비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를 관두라고요? 아니 어떻게 얻은 자린데 여길···"

 

"돈이 목숨보다 좋다는 겐가?"

 

"애도 온전치 않고 2년 만에 얻은 직장인데···"

 

"음···. 그래도 자넨 운이 좋은 사람이야. 우리 대한 무속 협회원들을 여기서 만났으니 말야.  원래 이런 일 돈 천은 받아야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우리가 여기 붙은 나쁜 살을 없애주겠네."

 

"정말입니까? 그럼 저는 계속 여기 다녀도 괜찮은가요?"

 

"대신, 우리가 살을 제거할 동안 우릴 도와야 하네. 알겠지?"

 

"아이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당연히 도와야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비는 모자를 벗고 찬수와 호법들에게 90도로 몸을 굽혀 인사했다.

 

찬수가 그의 안내를 받아 경비실로 가는 동안 나머지 호법들은 오피스텔의 네 방위에 위치한 벽에 붉은 문양을 그리고 그 위를 부적으로 덮었다. 몇은 자신이 서야 할 위치를 확인하여 자리를 다졌고, 몇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경비가 건네는 드링크를 받아 마시고 나온 찬수는 기다리던 선재, 대준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대한무속인 협회? 박무속? 허허허 형님 순발력이 보통이 아니시네. 그건 그렇고 점괘도 안 보시고 어떻게 경비 가족사를 아셨대?"

 

"오전에 왔다가 근처에 소일하는 노인들한테 얻어들었지."

 

"어깨 아픈 건요?"

 

"이 사람아 나이 쉰 넘고 어깨 안 아픈 사람 있던가?"

 

대준이 껄껄 웃었다. 505호에 앞에 서자 셋은 급작스럽게 얼굴이 굳었다.

 

"자네들 느껴지는가?"

 

"음···. 사방 결계진으로는 안 되겠는데요··· 뭐지 수맥인가?"

 

"수맥이 정확하게 이 아래를 지나가는군. 물의 기운이 결계를 방해할 거야. 그리고···"

 

찬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복도 천정을 바라보았다.

 

"하늘 방향도 좋지가 않아···. 안 되겠군. 대준 부장은 지하실로 내려가 수맥을 눌러. 선재 부장은 옥상으로 올라가 압을 막아주게"

 

"그렇게 되면 형님 혼자 극음을 감당하셔야 하는데···"

 

"쉽진 않겠지. 그래도 휼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는 게 더 중요해."

 

선재부장호법은 옥상으로 올라가고, 찬수와 대준은 1층으로 내려왔다. 그때 입구로 젊은 여성이 들어오더니 505호 우편함을 열고 편지를 꺼냈다. 대준과 찬수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기다리던 은해원이었다. 해원은 우편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찬수가 잰걸음으로 그녀를 앞질러 막아 세웠다.

 

"아가씨 잠깐만."

 

"무슨···일이시죠?"

 

찬수 등 뒤로 우락부락한 대준을 보고 해원은 긴장한 시선을 경비실로 던졌다.

 

"아. 걱정 말게 우린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고···간단히 소개하자면, 대한 골동품 수집연합회 사람들인데···"

 

"골동품?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아가씨 집에 수십 혹은 수백 년된 오래된 물건이 있을까 해서 말이지."

 

"아뇨. 그런 물건은 없고요. 골동품 같은 거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아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셔도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기서···"

 

해원은 대준의 어깨너머 경비실로 다시 눈을 돌렸다. 경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곧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해원은 묵례를 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 닫힌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닫히던 문은 다시 열렸다. 문을 완강하게 잡고 있던 찬수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아가씨.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말만 듣고 가시게."

 

찬수의 표정이 너무나 단호해서 해원은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오늘 새벽 혹시 이상한 일, 기이한 것을 보게 되면 지체없이 방에서 나오시게. 내 말 알아듣겠나?"

 

해원은 대답 대신 닫힘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이번에 찬수는 문을 놓아주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그가 말했다.

 

"내 말 명심하게."

 

찬수와 대준은 움직임 없이 엘리베이터가 5층에 닿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럼 ..."

 

대준은 말 대신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지하로 난 계단으로 내려갔다. 극음은 살아있는 사람에 깃들지 않으니 해원이 다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고 극음을 소멸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벽 두시가 가까워 오자 찬수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505호 앞에 섰다. 

극음이 도착이 임박했는지, 드러난 피부로 서늘함이 느껴졌고 여름밤인데도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찬수는 닭피와 버드나무 숯을 갈아 넣은 액체를 바닥에 흘리며 봉인진을 그려나갔다. 동심원의 12방향으로 12간지의 동물을 상징하는 부호가 새기고, 부호에서 뻗어 나온 선이 원의 중심에서 모였다.

 

건물의 각 위치에 선 호법들의 입에도 입김이 서리며 극음을 느꼈다. 

정문을 지키던 곽종문 호법이 경비를 찾았지만, 경비실은 텅 비어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다가 하는 수 없이 현관문을 닫아걸었다. 새벽이니 사람의 출입이야 없겠지만 돌발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그는 썰렁해진 공기에 몸을 털며 로비 가운데로 돌아와 정좌하고 앉았다. 같은 시각 건물의 각 위치에 자리를 잡은 호법들도 일제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기를 끌어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