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빛이 장막을 두드린다. 바람이 충분히 이울자 남자는 슬쩍 장막을 열어본다. 밤새 퍼 붇던 모래도 폐허를 삼키진 못했다. 새벽녘은 속삭임도 없이 바람 소리로 밝고 있다. 남자는 장막을 거두고 모포를 개기 시작한다. 소녀는 미처 뜨지 못한 눈을 거칠게 비빈다. 아저씨는 어제 안 무서웠어요? 기도 소리가 더 무서웠지. 그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기도가 무서워요? 그래. 남자가 답한다. 아이는 킥 하고 웃는다.
 장날은 가까워오지만 도시는 아직도 멀리 있다. 기적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제 시간에 도착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남자의 등 뒤로 새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서히 날은 밝아오고 있지만 쌀쌀함이 온몸을 꼿꼿하게 파고들고 있다. 가지꽃 같은 하늘에 아침이 마저 지우지 못한 별들이 묻어있다.

 사흘을 내리 걸었지만 풍광은 변하지 않는다. 뒤로는 괴기스럽게 솟은 탑, 앞으로는 광막한 모래밭. 여느 때처럼 정오가 찾아오자 둘은 작대기와 거적으로 만든 작은 그늘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남자는 쌍안경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도 남자를 발견한 모양인지 한 사내가 손으로 이런 저런 신호를 보낸다. ‘공격 의사 없음.’ 동의. 사내는 물통으로 보이는 물체를 흔든다. 뚜껑이 위로 향해 있으니 물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교환 가능’ 남자는 거절을 표한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호를 긋는다. 남자 또한 성호로 화답한다. 마찰은 적을수록 좋다. 쌍안경을 내리자 남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본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하면 벌 받는데요.
맞아, 대개는 그렇지.
아이의 의아한 얼굴 위로 쌍안경을 던져놓고는 남자는 짤막하게 남은 그늘에 고개를 누인다.
저 녀석들이 손톱보다 커지면 깨워. 그 말을 마치고 남자는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한다. 쌍안경에 비친 모습을 보니 그들도 자신들처럼 정오를 피하는 중이다. 굵고 검은 금속 기둥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이쪽으로 올 눈치는 아니다. 금세 실증이 난 아이는 잠시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려본다. 구불구불한 그림자와 모래 속에서 삐져나온 돌덩어리들, 사막의 풍경은 어디나 같다. 폐허로 눈을 돌려 본다. 폐허는 모래 아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삐죽이 나온 탑만 보일 뿐이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탑은 생각만큼 근사하진 않다. 반파된 채로 바람에 삭은 구조물들이 구멍에 지저분하게 낀 바퀴벌레 같아 보인다. 얼굴을 찌푸리던 아이는 문뜩 깜빡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분명 자신이 그날 봤던 그 불빛이다. 옆에서 코를 골던 사람이야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별도 아닌 것이 대낮에 저렇게 깜빡이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기만 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불빛이 좀 더 빠르게 깜빡이는 것도 같다. 마치 자신에게 뭐라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거긴 아무것도 없다.
툭 던지는 소리에 아이는 화들짝 놀란다. 망원경을 치우자 한껏 짜증나 있는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짝!
번쩍 하고는 시야가 왼쪽으로 꺾인다.
왜 마을에서 쫓아냈는지 알겠군.

짧은 휴식을 끝내고 둘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사박거리는 소리만 둘, 훌쩍이는 소리조차 없다.
분명 남자는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말이란 기름 통 옆에서 불을 다루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침묵은 대부분 옳았다. 횡액은 귀가 밝다. 그러니 제발 입을 다물자. 남자는 그리 마음먹는다.
말해. 하고 싶은 말.
목구멍에 들러붙어 있던 침묵을 가라앉히기엔 다소의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남자가 말을 꺼내고도 몇 번의 헛기침을 한 다음에야 아이가 입을 연다.
쫓겨난거...... 아니에요.
남자의 답변도 다소 시간이 지난 뒤에 나온다.
그래, 확실히 쫓아낸건 아니지.
그리고 이 손해보는 장사도 애당초 남자의 의도가 아니었다. 식용으로 쓰기엔 너무 늙었고, 도시 환락가에서 구하는 것은 언제나 처녀 뿐이다. 나머지는 아래가 버릇이 잘 못 들어서 쓸모가 없다나. 잘 해봐야 '양계장'에나 팔릴 상황이다. 하지만 그건 본전도 못 찾는 짓이다. 15년 전 인육이 공식적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이래로, 입 하나 줄여보려는 가정 때문에 수많은 늙은 딸들이 '양계장'에 취직했다. 수요가 충분한 물품이 고가일리가 없다. 문뜩 남자는 아이가 너무 늙어 쓸모가 없다는 발상의 역설을 깨닫는다. 히카사의 시계는 다소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곳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늙지 않은 사람들이다. 늙은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어리다. 그리고 언제나 늙은 것은 필요가 없다. 한정된 자원 사정에서 나온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한다. 시장은 사악할망정 어리석지 않다.
언니는... 아니, 엄마는 저한테 도망치라고 했어요. 거긴 지옥이라고.
엄마?
책에서 봤어요. 자길 낳아준 사람을 엄마라고 부른다고. 거기서 모든 여자들은 자매라고 해요. 하지만 베로니카는 제 엄마이기도 했어요.
그래? 그런데 거기가 왜 지옥이었는데?
엄마는 도시에서 왔어요. 아니, 정확하게는 20년 전에 강도들한테 끌려왔죠.
지옥은 천국의 기반이다. 남자는 이 뻔한 이야기를 반쯤 흘린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소음이지 사연이 아니다. 사연은 꽤 길게 이어진다. 말이 차고 넘친다. 남자는 슬슬 이 뚝을 언제쯤 닫아야 할지 고민하며 귀를 후빈다.

그래서 히카사에서 아는 사람은 있어?
삼촌이 있다고 했어요. 이름은 베니라고.
베니. 베로니카. 익숙한 이름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너무 흔한 이름이다. 아니, 흔한 이름이었지. 남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새 이름을 곱씹는다. 31356. 직능은 행상인.
이름만으로 사람 찾는 시대가 아니라서 말이지. 그래도 부디 삼촌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아저씨가 도와주세요.
삼촌이 돈이 있다면 말이지.
네!
아이의 활기찬 대답이 묘하게 남자를 움츠러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