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레미 마르는 언제나 사람이 붐비곤 했다. 작지는 않은 도시에 오래 자리했던 식당이라 웨이터들도 나이가 지긋하고, 인테리어와 분위기도 고전적이었다. 그러나 이 고상한 분위기의 식당이 돈 많은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을 위한 메뉴도 따로 있을 정도로 선택의 폭이 넓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 맛이 떨어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식당에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식당 뒤쪽 벽들까지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어 있었던 모양이니까. 아마 그들 대다수는 재미없는 국제뉴스보단 메뉴 정하기에 고심하고 있었겠지. 남자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그 긴긴 줄에 합류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들이 남자의 지갑을 가볍게 했으니 오늘도 메뉴는 샌드위치였으리라. 사실 좀 더 여유로웠더라도 그의 선택이 달라지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직장 상사란 종자들은 사람이 노는 만큼 게을러진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날도 남자는 철야를 해야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남자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꿈이니까 무엇이건 해도 좋을 텐데도 남자는 그냥 샌드위치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뚜뚜 거리는 자동차와 사람들 발소리, 어른들의 흔한 중대사와 아이들의 중요한 장난질, 지나갔다는데 돌아온 유행에 관하여, 연예인들의 공생활, 남자들의 치마 길이, 집값 붕괴, 늙은 아쿠타가와, 나생문, 태양 아래 빛나고 있는 가로등, 그리고 뜬금없는 사망의 골짜기.

 

남자는 눈을 뜬다. 잠은 모래 위 발자국처럼 간데없다. 밤새 흐느끼던 소리가 잠시 멎나 싶더니, 이번엔 잊힌 신들이 폐허 위로 강림한 듯하다. 이따금 들리는 굉음과 울림, 짧은 빛. 인간의 시대에서 해방된 태고의 폭력은 신위에 걸맞게 난폭하다. 간질 환자처럼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얇디얇은 장막만이 둘을 신화로부터 유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불 속에서 꼬물거리던 소녀가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떠는 것이 옷가지 너머에까지 전해진다. 이윽고 좁은 공간 안에 나직한 기도가 들린다. 아이는 푸르스름한 진노 앞에서 더 높은 이의 가호를 구하고 있다.

많은 경우 살아남은 자들도 생존을 그다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죽음 앞에서 짓궂은 장난 같이 살아남아버린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합리화 해줄 대상을 떠올렸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의 핑계가 되는 신은 편리한 도구였다. 자신들은 우연 같은 필연의 이끌려 미래를 맞았노라고.

소녀가 살았던 공동체는 강대함을 경배했다. 그러니 야훼의 이름이 가장 드높은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가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많이 학살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야말로 진실로 신앙의 기둥이다. 그러나 남자는 감히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폭력은 인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그가 기대고 있는 벽조차 쓰러트리지 못하는 나약한 것들을 경배할 이유 따윈 없다. 이따금 틈새로 들어오는 모래만이 남자를 귀찮게 할 뿐이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먹먹한 바람소리에 속삭임들마저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다만 작은 웅얼거림이 귀에 걸린다.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입을 틀어막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무시해버린다. 남자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문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밤은 깊고 어둡다. 남자는 다시 눈을 감는다.

꿈의 재료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종종 꿈은 다시 현실의 일부가 되어 비어있거나 넘쳐나는 것들을 일깨워준다. 그런 점에서 남자에게 꿈이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꾸지 않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