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택시 기사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는 유행 지난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쥘리에트 그레코의 냉소적인 말투가 귓가에 꽂힌다. ‘축제의 기쁜 날들은, 태양과 위성들은 춤추듯 둥글게 돌지만 소녀야 넌 똑바로 걸어가고 있어너와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분명 우리는 시작이 있음을 알기에 끝이 존재하리란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너의 동의하에서만 죽을 수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필연이 아니라 그저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죽음을 유예해 왔다. 딱 한번, 네가 떠나고 인간에 대한 의무감마저 소진된 순간, 비로소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었다. 무덤 속에 누워 있다 보면 언젠가 죽을 것이다. 실로 얄팍한 기대였다. 어둠 속에서 가라앉아 있는 동안에도 나는 한 순간도 잠들지 못했다. 그 뒤로 네가 끊임없이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너의 끊임없는 인간에 대한 애착으로 대변되어 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아주 가끔 이런 의문이 들곤 했다. 네가 인간을 사랑하는 까닭이 아직도 나를 위한 구실일까, 아니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변질된 것일까.

 

사회적인 지위는 기다리는 순번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 면에서 뱀은 나에게 많은 것을 배려해 주었다. 어찌됐건 그의 목적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함에 있다. 제사장은 신민들에게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왕도, 신도 아니다. 다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뱀이 쥐고 있는 정보였고, 나는 그와의 거래를 동의했었다.

연회장에는 인간들도 제법 많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앙 은행장의 디네에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안다. 비록 인간 아닌 것들이 그림자 속에서 군림한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암약에 불과하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에게서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강해졌고, 그만큼 인간 아닌 것들은 위축되었다. 그들은 트란실바니아의 괴담처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보다 조금 더 튼튼하고 오래 사는 생물일 뿐이다. 오래 산다는 점 때문에 보다 잃을 것이 많아졌을 뿐. 겨울이 오자 짐승들은 자본으로 장벽을 두르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뭉쳤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뱀은 앙시앵 레짐이 붕괴했을 당시의 교훈을 몸으로 배운 세대였다. 그리고 최근의 시위들은 왕을 단두대로 보내던 시기를 연상케 했다. 그런 그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모인 것이 오늘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짐승들에게 보호를 요청받고 있다.

나에겐 여러 이름이 있어왔고, 그 중 대부분은 바람과 원망이 섞인 타인의 시선이 나의 이름을 이루었다. 그들의 빛나는 욕망이 내게 목줄이 되었고, 나는 그들 위에 군림하는 노예였다. 세상이 변하고 그에 맞춰 욕망이 변해갔다. 인간만이 변하지 않았다. 대다수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벅찬 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처럼 변해갔다. 그것은 단지 내가 충분히 오래 살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그들과 멀어져가고 있었다. 호양목이 쓰러지고 썩어가는 동안에도 내가 그들 곁에 있었던 것은 형태만 겨우 남아있던 얄팍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미 깨진 그릇에 물을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들은 다소 거만하게, 짐승들은 조심스레 나에게 이름을 기댄다. 왕의 목을 잘랐던 이 나라에는 이후에도 몇 번이고 다시 왕이 들어섰지만, 그때마다 시대는 왕좌를 거칠게 내던졌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매번 누군가는 왕을 바란다는 말이기도 했다. 민주주의 선거는 정권을 바꿀 수 있고, 정권이 바뀌면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은 불안에 떤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안정이다. 왕이 존재함으로서 그들은 구속받지만 또한 안정감을 갖게 된다. 비록 그것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왕이라도. 너무나도 복잡한 이 시대에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지킬 정도의 능력은 있다. 뱀은 파리의 19세기를 살아왔다. 다만 두려움이라는 본능 앞에 스스로를 다잡게 만들 우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만큼의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지배할 것이다.

너라면 이 순간에 무슨 말을 했을까. 너는 나에게 당부했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고 그들을 존중해주자고. 대신 이제 의무도 없으니 아무것도 얽매이지 말자고. 물론 오래 전의 약속이었고, 그 시간 동안 나와 너는 인간처럼 살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어길 때도 많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충분히 인간적이었다. 거래에 익숙한 나와는 다르게 너의 충동적인 동정심은 종종 역사적 변곡점의 원인이 되었다. 대가 없는 호의가 재앙으로 변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것은 네가 선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게 눈을 감을 것을 권했다. 그러자 네가 원인이 되는 일도 없어졌다. 그걸로 됐지 않은가? 너의 날개는 아직도 꼿꼿하다. 너는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고 있고, 그들은 너의 보살핌이 없더라도 굳건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만물을 이름 지었고, 길들일 수 없는 것들을 길들여왔다. 그들의 내면만 길들여지지 않았을 뿐. 하지만 군림하는 자들이 길들여질 이유는 없다.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자만이 그들을 길들일 수 있겠지만, 너는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평탄한 미래를 축복으로 마무리하고 승천하듯 무대를 빠져나온다. 그 뒤는 인간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밖은 밤과 낮의 교차점들로 점멸하고 있다. 상공에는 비행기들이 눈을 깜빡이고 있다. 신화와 전설의 영역을 철로 된 날개가 헤엄치고 있다. 분명 그들은 날개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을 날고 있고, 이제 곧 달에 가 닿을지도 모른다. 오직 이야기꾼들만이 별들을 가로질렀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너는 날개 없이도 너의 영역에 침범한 이들을 도우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형태 없는 도움이며, 앞장서지 않는 길잡이다. 나는 너의 시도가 부디 성공하기를 빈다. 그리하여 인간이 변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너의 행동이 의미 없진 않을 것이다. 네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더라도, 나를 변하게 만들어 왔으니까.

오후 1033. 뉴욕 편 팬암 비행기가 출발하기 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뱀이 건네 준 편지를 꺼낸다. 봉투에는 거리만큼이나 길고 다양한 우표가 붙어있다. 발신지는 우드스톡. 그리고 하얀 편지지엔 희미하게 라일락 향이 난다. 거기엔 지금은 사라진 주소가 적혀 있다. 추억에 매장된 주검 아닌 살아가는 나에게 보낸 초대장. 언제나 찾아오던 네가 아닌, 찾아가는 나를 찾기 위한 너의 고된 여정이다. 고로 우드스톡에 있는 사람은 네가 아니다. 그러나 너는 내가 발신인을 만나길 바랄 것이다. 너는 뱀에게 그랬듯 내가 또 다른 누군가와 거래하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의 누군가와 맺는 인연은 현재와의 연결통로가 된다.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삶을 연기하기에도 벅찬 나에게 너의 바람은 지난한 요구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지금 너의 초대를 거절한다 해도 네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리도 없다. 너의 시간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너는 그저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같이 놀 친구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단지 그것을 원하므로 결과는 생각지 않고 달려드는 너는 어리석다.

택시를 부른다. 기사가 목적지를 묻는다. 나는 답한다. 공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