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호시죠? 택배 문 옆에 두고 갑니다.

핸드폰 너머로 헐레벌떡 외치자마자 끊기는 사내의 목소리에 나는  아내가 집에 없나? 생각했다가 아! 친정 간다고 했구나 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이를 들어가는 증거인지 깜빡하는 것들이 참 많아졌다.

-과장님? 사모님이세요?

커피를 마시던 최주임이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최주임과는 띠동갑에 가까운 나이 차이인데도 서글서글한 태도와 시원시원한 일처리 때문인지  어린 사람이라기 보다는 동년배로 느껴지곤 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미묘한 것도 같았지만 말이다.

-아니, 택배야.

-연예인 사모님 아니구요?

-연예인은 무슨, 젊었을 때 쇼핑몰 모델 몇번 한 거 가지구... 됐구, 납품조서 마감이나 빨리 하라고. 재무팀 김과장이 이를 갈고 있던데.

-김과장님요? 아무튼 성격이 참… 

나는 머슥해서 말을 돌렸고 최주임은 김과장 성격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저으며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또 친정에 가 있는 아내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내는 확실히 나보다 몇살 어린데다 결혼 전엔 쇼핑몰 모델을 선 적이 있는 미인이기도 했다. 성격도 활발하면서 배려가 깊어,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미안해지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친정에 왜 갔더라…

그러다 문득 아내가 친정에 왜 갔는지가 생각이 나지 않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 성격에 나한테 화내고 간 것은 아닐테고, 친정에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또 이런저런 일에 치여 금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잊혀졌다.

-이게 뭐지? 아! 택배두고 간다고 했지.

하루를 쫓기듯 달리듯 보내고 퇴근해서 어둑해진 아파트에 들어서서 집문을 열려는데 발치에 무언가 치였다. 처음엔 누런색의 작은 상자가 무엇인가 했지만 이내 택배기사에게서 전화가 왔던 것을 떠올렸다.

-이 사람이 친정에 가니까 이런것도 챙겨줄 사람이 없구만.

나는 묵직한 철문을 열고 어둑한 집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식탁에 툭 상자들 던져두고 식탁등을 밝혔다. 굳이 사람도 없는데 거실을 밝힐 필요는 없으니까.

웃옷을 벗고 낡은 넥타이를 풀면서도 자꾸 상자에 눈이 갔다. 그리 무겁지는 않은데. 나한테 올게 있나? 아내가 친정 가기 전에 내 이름으로 뭘 주문한 건가. 자꾸 드는 생각과 궁금증에 결국 옷을 벗다 말고 상자를 집어들었다.

-지갑이잖아?

상자를 봉한 종이테이프를 대충 뜯어 상자를 열어보니 지갑이 들어있었다. 반으로 접히는 짙은 밤색의 낡은 가죽지갑이었다. 돈이 들어있나 보았지만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아내 거는 아닌데… 내가 언제 지갑을 잃어버렸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지갑을 잃었다면 많이 곤란했을 터고 분명 기억이날텐데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지갑의 카드꽂이를 더듬어 보니 프라스틱 카드 한장이 꽂혀있었다. 주민등록증이었다.

대체 이 낡은 지갑의 주인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의 지갑이 우리 집으로 왔는지 궁금해하며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사진을 보았다. 까무잡잡하고 볼은 홀쭉하고 광대는 도드라지고 눈이 움푹한 것이 무슨 난민마냥 굶주림과 피로에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름 열심히 빗은 것 같지만 이발할 때를 한참 지난 것 같은 긴 머리 아래로 세상 피곤해 보이는 두눈이 퀭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 누가 이런 사진을 주민등록증에 쓰는 건지 원. 팔일영구이...이건 내 번호인데!? 이게 나라고?

나는 지금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된 내 모습을 떠올리고 그런 나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한참이나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그래. 전에는 이렇게 마른 적도 있었지. 아마 대학에 겨우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고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가시고 군대 영장은 나오고 좋아하던 사람에겐 차이고… 세상이 다 싫어지고 주변 사람들도 싫어졌던 그런 때 였을 거야. 아마 군대 가기 전에 다시 만들었던 주민등록증이었는데…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새로 시작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잃어버리고 또 다시 만들었었던가…

나는 잊고 지냈던 그땐 그랬지 싶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고 씁쓸히 웃으며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보았다. 그땐 정말 힘들었는데, 그래도 또 살다보니 살아지더라 하고 예전의 나에게 속으로 말을 걸고 위로를 건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이제 돌아왔지? 벌써 십년이 넘었는데… 누가 보낸 거지? 발신인이 없는데? 이렇게도 택배가 보내지나?

뜯었던 상자를 다시 살펴봤지만 발신인도 표시되어있지 않았다. 수신인에는 분명 내 이름과 주소가 표기되어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이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아내와 결혼하고 몇년 전부터 살고 있는 것이고 중간에도 몇번 이사를 해서 예전 주민등록증의 주소로는 이곳에 택배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낡은 지갑과 주민등록증이 나에게 돌아왔단 말인가.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주워서 보관하다가 잊고 있다가 이제사 돌려주었다는 건가? 하지만 그럴만한 사람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헤집으며 냉장고에서 대충 밑반찬과 차가워진 밥을 꺼내 대충 렌지에 뎁혀 먹고는 얼추얼추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해서의 일이었다.

-401호시죠? 택배 문 옆에 두고 갑니다.

불쑥 핸드폰이 울려서 받았더니 남자의 목소리가 급하게 들리더니 뚝 끊겼다. 무슨? 가만 생각해보니 어제도 택배왔다고 전화를 했던 그 목소리였다. 택배기사들이 바쁘다는 거야 알지만 이건 좀 너무 일방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과장님 무슨 일 있나요?

서류를 한 뭉치 들고 지나가던 최주임이 들었는지 멈춰서는 물었다. 성격이 좋은 건지 오지랖이 넓은건지.

-아니, 택배라는 군. 근데 지 할 말만 하고 틱 끊잖아.

-뭐 그 사람들이 워낙 바쁘잖아요. 요즘에 과로사 1순위가 택배기사라는 걸요. 뭐 사셨어요?

-아니, 아내가 뭘 시킨 거겠지. 친정에 가 있거든. 

-아! 그 연예인 사모님이요?

-연예인은 무슨, 젊었을 때 쇼핑몰 모델 몇번 한 거 가지구... 됐구. 마감 서류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겠어? 재무팀 김과장이 이를 갈고 있던데.

-김과장님요? 아무튼 성격이 참… 

최주임은 재무팀 김과장 성격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치곤 가버렸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아내가 내 이름으로 무얼 시킨 건지, 혹 어제처럼 무언가 생각도 않던게 나한테 온건지 생각을 해보다가 또 일에 쫓기다가 그렇게 하루를 간신히 보냈다.

-이게 뭐지? 아! 택배두고 간다고 했지.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삑삑 누르다가 문 옆에 놓인 누런 상자를 발견했다. 그리곤 이내 회사에서 받았던 택배기사의 전화가 떠올랐다. 상자를 집어들어 흔들어보며 현관문을 열고 거뭇한 어둠에 흑백화면처럼 보이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벽을 더듬어 식탁등을 키고서야 약간 붉은 빛을 띄고 사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무겁진 않은데....

무언가 가벼운 하지만 딱딱한 것 같은 내용물이 안에서 두터운 종이상자와 부딪히며 덜컥덜컥 소리를 냈다.

-분명 내 이름이 맞는데… 누가 보냈는지도 없는데…

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일단 상자를 뜯어보았다. 안에서 나온 것은 까만 플라스틱 액자였다. 벽에 거는 큰 액자가 아니라 문갑이나 책상위에 세워두는 일반 사이즈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였다.

액자에는 사진이 한장 이미 들어있었는데, 야자수 아래에서 멀리 백사장과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젊은 남녀가 팔짱을끼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무슨 신혼 여행 사진 같은 데… 이게 왜 나한테 왔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런데 이 여자는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어! 아내 잖아! 아내 젊었을 때 사진인 모양인데 이 남자는 누구지? 아! 나구나! 맞아! 신혼여행 갔을 때 사진이네. 이게 벌써 십년이 다 되가네. 그런데 이 사진이 왜 택배로 온 거지? 분명 재작년에 이사하면서 잃어버려서 아내가 엄청 속상해했는데...

나는 사진을 살피며 중얼중얼 하다가 이내 자기모습을 깨닫고는 피식 웃고 혼잣말을 멈췄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찬거리와 식은밥을 꺼냈다. 식은 밥을 렌지에 대충 뎁혀 꺼내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까만 액자를 내내 보며. 지금도 어디가나 미인소리를 듣는 아내지만 저때는 정말 예뻤단 말이지. 처음에 어떻게 만났더라? 분명 누가 소개를 해줬는데 지금은 누구 소개로 만났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멋쩍게 어느 카페에서 처음 만나고 엄청 놀랐던 일 그리고 이야기를 해보고 생각보다 마음이 잘통했던 일, 그리고 그 뒤로 같이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남들처럼 데이트를 했던 일이 생각났다.

대충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작은 거실의 쇼파에 반쯤 눕듯 파묻혀 앉아서는 내내 그 액자를 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며 괜히 혼자 부끄러워 하기도 하고 아내에게 고마워 하기도 미안해 하기도 하다가 느즈막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잠들기 전에 문득 아내가 왜 친정에 갔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전화를 해보려다가 너무 늦은 시간인 것 같아 그냥 잠을 자버렸다.

-401호시죠? 택배 문 옆에 두고 갑니다.

-이봐요! 어디 택배회사인데요? 이봐요?

다음날도 출근해서 한창 일하는 중에 불쑥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택배기사를 붙들고 뭐라도 알아보려고 했지만 전화는 순식간에 일방적으로 끊겼다.

-무슨 전화인데 그러세요? 연예인 사모님이세요?

커피를 들고 지나가던 최주임이 멈춰서는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분명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택배기사인데 뭐 좀 물어볼려니까 그냥 끊어버리네 그래.

-뭐 그 사람들이 워낙 바쁘잖아요. 요즘에 과로사 1순위가 택배기사라는 걸요. 뭐 사셨어요?

-아니, 아내가 뭘 시킨 거겠지. 친정에 가 있거든.

-과장님, 그 농담 재미 없어요. 언제까지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을 아내라고 부를 거에요. 그러면서 늘 친정에 가서 없다고 하고. 그러지말고 소개라도 받으시라니까요.

최주임은 좀 흐려진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가버렸다. 무슨 소리람? 아내가 친정에 며칠 가 있긴 하지만 분명 난 결혼을 했는데, 최주임이 뭔가 잘못 알고 저러는가?

그래서 난 친정에 간 아내에게 전화를 걸려했다. 하지만 최근 통화목록엔 워낙 거래업체나 다른부서에서 온 전화만 지저분하게 늘어서 있었고 아내의 번호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전화번호부를 열고 아내의 번호를 찾았지만 빽빽한 목록 속에 도통 찾아지질 않았다.

-왜 이럴 땐 꼭 기억이 안나는지 원. 분명 아내나 마누라로 저장을 했을텐데... 뭔가 실수로 지운건가?

결국 그렇게 좀 어수선하게 하루를 마치고 또 문 앞에 높인 택배상자를 짚어들고 어두운 방안으로 들어왔다. 식탁등을 켜니 어제 받은 작은 액자 속에, 등 뒤에서 내가 끌어안은 모습으로 아내가 환히 웃고있었다.

-이 사람이 언제 온다고 했더라… 안 그래도 자꾸 깜빡하는데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정신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부재중인 아내에게 괜히 투덜거려보고는 택배상자를 뜯어보았다. 안에는 비닐뭉치가 들어있었다. 무언가 작은 걸 정성스레 포장한 모양이었다. 부스럭부스럭 포장을 풀어보았다.
-이게 뭐지? 헉! 손가락이잖아!

비닐 안에 든 하얗고 길죽한 것을 살짝 물컹한 느낌과 함께 집어들었다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바람 새는 소리를 뱉고는 떨어트렸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은 유리에 덮인 까만 나무 식탁위에 툭 떨어졌다. 피도 흐르지 않았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꼭 장난감 인형이나 마네킹의 부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얗고 모양이 좋은 손가락이었다. 살짝 기른 손톱은 잘 다듬어져있고 매끈하게 윤기가 감돌았다.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누가 이런 흉한 장난을 쳤을까? 장난감이라기엔 너무 잘 만들었는데…

살짝 손가락을 뻗어 식탁 위의 손가락을 만져보고 그 부들부들한 피부의, 하지만 살의 탄력이 없어 물컹하게 느껴지는 접촉감 그리고 있을리 없는 온기를 느끼고는 소름이 곤두섰다. 아마 여자의 중지나 검지로 보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현실의 감각과 그럴리 없다는 생각과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손가락의 매끈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뒤얽혀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꼭 어떤 손가락이, 그 손가락이 머릿속에서 뇌를 휘젓고 긁어대는 기분이었다.

-과장님 연차내셨다면서요?

다음날, 이 정체모를 택배를 직접 확인하려고 연차를 내고 집에 있는데 최주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저런, 혼자 사시면서 몸 아프면 힘들잖아요. 일 걱정은 마시고 푹 쉬고 오세요.

-그래, 그래 고마워.

나는 여전히 치우지도 어쩌지도 못한채 식탁위에 놓인 누군가의 손가락에 자꾸 끌리는 시선을 억지로 돌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였다. 바로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 번호였다. 발신전용 번호의 그 번호. 요 며칠 몇번이나 받아서 기억하고 있는 택배기사의 번호였다.

-401호시죠? 택배 문 옆에 두고 갑니다.

-이봐요! 이봐! 기다려!

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수화기에서는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서둘러 벌컥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레베이터는 높은 층에 멈춰 있었고 계단은 조용했다. 그저 덩그러니 문 옆에 누런 택배상자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대체…

내가 늦은 것일까? 아니면 택배기사는 벌써 놔두고 아파트에서 나가면서 전화를 한 걸까? 왜 굳이? 택배기사가 무언가 알고서 나를 피하는 걸까? 그래! 그가 이 이상한 택배를 보낸 사람이 아닐까? 나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혹시 계단 어느 구석에 택배기사가 숨어서 나를 노려보는 것은 아닌지 살폈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모두 출근하고 아이들도 학교에 갔을 시간대의 아파트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한참이나 그 택배상자를 보았다. 현관 옆에 조용히 놓여있는 누런 상자. 발신인도 없이 받는이만 인쇄되어 붙어있는 상자. 한 손으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크기, 어제 받은 상자와 똑같아 보이는 상자였다.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간신히 손을 뽇어 상자를 들고는, 혹여 누가 내 모습을 보지나 않는지 괜히 한번 텅빈 계단 위아래를 다시 살피고는 상자를 집어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서 상자를 뜯는 손이 덜덜 떨렸고 손의 떨림을 따라 상자 안에서도 무엇인가 흔들리며 골판지상자에 부드럽게 툭툭 부딪히고 있었다.

부지직-! 상자를 포장하고 있던 테이프가 뜯겨나가고 상자를 벌리니 안에는 역시나 겹겹의 뽁뽁이 비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뽁뽁이 비닐을 들어내니, 여전히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그 손가락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손으로 만지기 두려워서 상자를 뒤집어 식탁에 툭 떨어뜨렸다. 핏기 없는 기름한 손가락은 데굴데굴 굴러 먼저의 손가락 언저리에 비스듬히 멈췄다. 저번것이 중지였다면 이번 것은 좀 더 짧은 것이 검지나 장지인 것 같았다. 약지라기엔 그렇게 가늘지 않았으니까.

-죽었겠지?... 누구일까?...

산 채로 손가락을 잘랐을 수도 있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잔인하지 않은가. 아마 죽은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보낸 것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누구일까? 잘다듬어진 손톱이나 곱고 가는 것을 보면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여자일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가락에서 눈을 떼다가 식탁 한켠에 놓인 액자를 다시 보게됐다. 바다를 배경으로 남자의 품에 안겨웃고 있는 여자의 사진, 나와 아내의 신혼여행 사진. 문득 감싸고 있는 남자의, 나의 팔뚝을 잡고 있는 여자의 손, 아내의 손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다시 식탁 위의 손가락을 보았다. 닮아 있었다.

-그럴리가…

나는 심장이 쿵쾅대로 시선이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급히 아내내에게 전화를 하려 했다. 하지만 통화목록에서도 전화번호부에서도 아내를 찾을 수 없었다.

-왜 친정 전화번호도 안 보이지? 분명 장모님 연락처가 있었을텐데…

손은 떨렸고 글자와 숫자는 작고 흐릿했다. 나는 급히 안방에 들어가 서랍을 찾아봤다. 분명 어딘가에 핸드폰이 고장날 때를 대비해서 전화번호수첩 같은 것을 두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첩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모든 서랍과 옷장과 문갑을 헤집다가 문득 아내의 옷가지가 속옷 하나 양말 하나 남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이 사람이 무언가 화가 나서 짐을 꾸려서 친정에 간건가? 그래서 내 핸드폰에서도 자기번호나 친정번호를 다 지워놓은 건가? 하지만 뭐가 그렇게 섭섭하다고… 그렇게 섭섭할 일이면 분명 싸우기라도 했을텐데 왜 나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그렇게 정신 없이 사방을 헤집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401호시죠? 택배 문 옆에 두고 갑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급한 목소리가 제 말만 외치고 뚝 끊겼다. 벌컥 문을 열고 나가보니 또 택배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제는 하루에 두 번도 오는 건가?

택배 상자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401호시죠? 택배 문 옆에…

나는 욕을 하며 핸드폰을 끄고 들고 있던 택배 상자를 식탁에 집어던졌다. 택배 상자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떨어지더니 놓여있던 두 손가락을 밀어내고 검은 액자에 부딪혔다. 액자는 그대로 밀리더니 식탁 밖으로 툭 떨어졌다. 빠직 하고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씨…

나는 다시 한 번 욕을 하고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집어들었다. 유리는 크게 몇조각이 나서 떨어지고 까만 프라스틱 액자 틀도 금방이라도 조각날 것처럼 틀어져서는 팔랑 사진을 떨궜다. 아니, 사진을 집어들려고 보니 그건 인화한 사진이 아니라 잡지 표지 같은 것을 오린 것이었다.

-왜? 분명 우리 신혼 사진인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천천히 현관문을 여는데 무엇인가 평소보다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힘주어 열어보니 크고 작은 택배상자가 여러개 쌓여있었다. 알 수 있었다. 어느게 어느 것인지 몰라도 저건 분명 손가락과 팔과 다리와 몸통과 머리가 나뉘어 담겨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현관 앞에 주저 앉았다. 또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의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