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매서웠던 추위가 잦아들고 나뭇가지에 쌓인 하얀 눈과 주렁주렁 고드름이 말갛게 반짝이는 물방울로 녹아 떨어졌습니다. 하루하루 아침은 일찍 찾아들었고 검게 죽었던 가지는 밝은 색을 되찾아가며 연녹색의 작은 싹과 꽃망울을 피워올렸습니다. 그리고 나무둥치에 쌓여서 얼고젖고녹으며 삭은 낙엽더미에서는 콩알보다 쌀알보다 작은 알이 아주 천천히 꿈틀거렸습니다.

세상이 환해지고 따뜻해지고 싹이 잎이 되고 꽃망울들이 부끄럽게 벌어질 때까지, 하루하루 천천히 흔들리던 작은 알은 결국 찢어지더니 상아색의 작은 애벌레 한 마리를 뱉었습니다.

아! 드디어 세상에 나왔구나!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섞여있지만 그래도 햇살은 좋으니까 괜찮아!

애벌레는 콧노래를 부르며 막 돋은 풀의 연한 싹을 사각사각 먹었어요. 풀싹에서는 초봄의 맛이 났어요. 풀싹을 먹는 동안 애벌레의 도톰한 잎 동그란 머리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긴 몸이 순서대로 녹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상아색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얗고 동그란 작은 덩어리 하나가 꼬리 끝에 댕글 매달렸어요.

끙아! 아이 부끄러! 아무도 못봤겠지? 새싹은 먹어도 먹어도 맛있구나. 소화도 잘 되나봐, 먹으면 먹는 만큼 순풍순풍 나오는 걸!

하지만 애벌레는 몰랐어요. 아무데나 끙아를 흘리면 큰 일 난다는 것을.

다들 여기 와봐라겜! 고소하고 맛있는게 떨어져있다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까만 것들이 몰려왔습니다. 까만 것들은 좌우로 벌어지는 날카롭고 무서운 입을 딱딱 열었다 닫으며 잘록한 허리 아래 까맣고 통통한 배를 흔들며 와글와글 겜겜 몰려들었습니다.

세상에! 살려줘요!

애벌레는 그 까만 벌레 무리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요. 하지만 까만 벌레들은 애벌레가 흘린 끙아 자국을 따라 겜겜 몰려오더니 결국은 애벌레를 둘러쌌습니다. 봄날의 따스한 햇빛이 사라지고 연한 새싹의 초록빛도 사라졌습니다. 온통 번들거리는 까만 빛과 날카로운 입이 딱딱 거리는 소리 그리고 겜겜 거리는 목소리 뿐이었습니다.

어디로 나를 끌고 가는 거에요? 놔주세요!

애벌레는 사방에서 작고 딱딱한 손들이 말랑말랑한 애벌레의 몸을 잡더니 밀고 당기며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느끼고 소리쳤어요. 동글동글한 긴 몸을 흔들어서 그 손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손들은 애벌레를 놓아주지 않았고 겜겜거리며 한참을 가더니 땅바닦에 시커멓게 뚫린 동굴로 애벌레를 끌고 들어갔습니다.

아! 이 까만 것들은 악마들이구나! 나를 땅밑 지옥으로 끌고가는 거야. 그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이제 겨우 세상에 나왔는데…

몸부림도 소용이 없고 시커먼 동굴의 어둠 속을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여 한참이나 끌려가던 애벌레는 엉엉울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귓속에 와글와글 울리던 겜겜 소리가 사라질 때쯤 애벌레는 다시 정신이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새카만 어둠 속이었습니다. 애벌레는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축축하고 미지근한 벽 같은 것에 막혀서 움직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옴짝달싹도 못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애벌레는 어둠이 눈에 익고 자신이 지하의 작은 공간에 놓여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방은 축축한 흙으로 둘려있었습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절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애벌레는 한참이나 기다려보다가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걱정말라겜. 일겜이들이 널 죽이려고 힘들게 데려온게 아니다겜.

애벌레는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에 놀라 두리번 거렸습니다. 이내 자신이 있는 공간의 출입구로 생각되는 작은 구멍에 서있는 반짝이는 까만색의 벌레를 발견했습니다. 그 벌레는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온 악마같은 벌레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등에 투명하고 긴 날개가 돋아서 몸통을 따라 접혀있는 것이 또 달랐습니다.

제발 절 여기서 놓아주세요.

그건 내가 해줄수 없는 거다겜.  나는 숫겜이1호다겜. 나는 굴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다음번에 올때 다른 도와줄만한 걸 말해보라겜.

까만벌레는 동그란 머리를 휘휘 젔고는 애벌레가 있는 방에서 나갔습니다.

제발…

풀이 죽은 애벌레가 훌쩍이며 긴 몸을 말고 있는데 방저편 어두운 동굴너머에서 와글와글 거리는 소리들이 가까워졌습니다.

여기다겜. 이 애벌레가 맛있는 걸 만든다겜.

아무것도 없다겜?

배가 고파서 그런가보다겜. 먹을 걸 줘보자겜.

이걸 주자겜. 자 애벌레야 이걸 먹고 어서 맛있는 걸 만들어라겜.

애벌레를 이 땅속 동굴로 끌고왔던 그 까만 벌레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서 애벌레를 둘러싸과 왁자지껄 겜겜 하더니 무언가 살덩어리 같은 음식을 애벌레의 입에 들이밀었습니다.

싫어요! 나는 새싹이 좋단말이에요! 향긋한 봄냄새가 나는 새싹을 봄바람을 맞으며 햇빛 아래서 먹고 싶어요.

애벌레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까만벌레들은 애벌레의 몸을 붙잡고 입을 벌리더니 살덩어리 음식을 마구집어넣었습니다. 어푸어푸 애벌레는 억지로 음식을 먹었어요. 먹기는 싫었지만 원래 딱히 초식은 아니었던 애벌레의 몸은 애벌레의 마음과는 달리 살덩어리 음식을 꿀떵꿀떵 먹고 소화시키고 순식간에 끙아를 내뱉었습니다.

와와! 여기봐봐 달고 고소한 게 나왔다겜!

좋다겜! 더 먹여봐라겜! 잔뜩 먹여서 잔뜩 만들게 하자겜.

까만벌레들은 계속계속 애벌레의 입에 살덩어리 음식과 무엇인지 모를 음식들을 집어넣었습니다. 애벌레는 억지로 음식들을 소화시키고 끙아를 만들었고 벌레들은 애벌레의 꽁지에 달라붙어 저마다 신나게 끙아를 먹었습니다.

흑흑, 이런 건 싫어요. 날 놔주세요.

애벌레는 발버둥치는 것도 포기하고 바닥에 늘어져서 엉엉 울었어요. 잔뜩 배를 불린 까만벌레들은 다시 와르르 겜겜 애벌레의 방에서 나갔습니다.

무어 필요한 거 없냐겜?

날개달린 까만 벌레, 숫겜이1호가 어느새 다시 와서 애벌레에게 물었습니다.

절 제발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당신의 친구들이 저를 억지로 가둬두고 맘대로 하고 있어요.

그들은 일겜이들이다겜. 그들은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는 거니 너무 미워하지 말라겜.

미워하지 말라고요? 그들이 내게 이상한 살덩이를 먹였다고요! 내 입을 벌리고 그걸 막 밀어넣었단 말이에요. 흑흑.

네가 먹은 건 우리 동족의 아이들이었다겜.

숫겜이1호는 훌쩍이는 애벌레를 보다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습니다. 그 말에 애벌레는 깜짝 놀라서 숫겜이 1호를 쳐다보았어요. 까맣게 반짝이는 눈 짧은 더듬이 날카로워 보이는 좌우로 벌어지는 입으로는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숫겜이 1호의 얼굴은 슬퍼보였어요.

우리 몸을 봐라겜. 우린 이렇게 허리가 가늘어서 크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겜. 아주 작거나 액체로 된 음식 밖에 못먹는다겜. 그래서 네가 만드는 고소하고 맛있는 음식은 아주 소중하다겜. 그래서 우리 동족의 아이들을 희생하고서라도 그 음식을 얻기로 한거다겜.

그건 너무…

우리 겜이 종족은 그렇다겜. 어느 하나하나보다 한 굴의 겜이들이 살아남는게 중요하다겜. 그래서 널 놔주는 건 도와줄 수 없다겜. 하지만 무언가 필요한게 있으면 말해라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꼭 도와주겠다겜.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여기서 나가는 거에요.

애벌레는 겜이들의 삶에 몸서리를 치면서 더더욱 이 지옥 같은 굴에서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숫겜이 1호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는 다른 부탁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하고 다시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축축하고 어두운 겜이 굴에서 애벌레는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도 몇번이고 일겜이들은 어린 겜이의 조각을 가져와서 애벌레에게 강제로 먹이고 끙아를 먹고 갔습니다. 한번은 방에서 나가려고 하다가 다른 겜이들보다 머리가 몇배나 크고 날카로운 입도 몇배나 큰 겜이에게 막히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날카로운 입이 애벌레의 보드랍고 통통한 상아색 몸을 찔러서 작은 상처가 나기도 했습니다.

무어 필요한 거 없냐겜?

굴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숫겜이 1호는 애벌레가 갖힌 방을 다시 찾아서 물었습니다. 애벌레는 때론 울고 때론 화내며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숫겜이 1호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라고 했습니다.

무어 필요한 거 없냐겜?

숫겜이 1호는 어느새 일겜이들이 가져다 주는 음식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애벌레에게 물었습니다. 애벌레는 이제는 숫겜이 1호에게 부탁하는 것도 지쳤는지 고개를 저으려다가 무언가를 문득 생각하고는 멈췄습니다.

새싹을, 연한 봄빛의 싹을 가져다 줄 수는 없나요? 햇살의 냄새, 바람의 촉감, 봄의 맛이 느껴지는 새싹을 먹고 싶어요.

숫겜이 1호는 어딘가 체념이 느껴지는 애벌레 1호를 물끄러미 까만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겜. 나도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지만 굴을 드나들 수 있는 일겜이들에게 부탁하면 그정도는 해줄 거다겜.

그렇게 숫겜이 1호가 애벌레의 부탁을 듣고 나서부터는 일겜이들이 가끔 풀잎 나뭇잎 새싹을 구해오곤 했습니다. 애벌레는 살덩어리에 익숙해진 입에 새싹을 살짝 물고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바깥 세상의 봄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새싹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잠깐이고 이내 자신을 둘러싼 축축하고 어두운 땅 속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왜 당신은 밖으로 나가지 않죠? 당신도 갇혀 있는 건가요? 같은 종족인데?

어느날 애벌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없느냐고 잘 지내느냐고 물어보는 숫겜이 1호에게 물어봤습니다. 숫겜이 1호는 그런 애벌레의 말에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좌우로 벌어지는 작은 입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마치 씁쓸한 미소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지나고 애벌레는 어느날 일겜이들에게 더는 새싹을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애벌레는 살덩이를 먹고 끙아를 만들고 일겜이들이 달라붙어 자신의 끙아를 먹는 것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바깥 세상의 여린 파랑색 하늘, 연한 녹색의 새싹, 물이 오른 갈색의 나뭇가지들, 부드러운 바람, 따스한 햇살 모든 것이 시커먼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숫겜이 1호가 가끔씩 들러 이런저런 말을 던졌지만 애벌레는 점점 대답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열심히 더 열심히 일겜이들이 가져다주는 살덩이들을 먹으며 조금씩 조금씩 상아색 몸이 통통해져갔습니다.

어휴, 이녀석 좀 봐 먹기는 잔뜩 먹는데 맛있는 걸 만드는 건 전보다 줄었다겜.

그러겜. 너무 뚱뚱해져서 방이 꽉 찰지경이다겜.

일겜이들도 애벌레의 변화를 알아채고 투덜댔습니다. 하지만 애벌레는 더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살덩이를 먹고 먹고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자 점점 먹는 것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통통하게 변한 애벌레의 몸이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녀석 병든 거 아니냐겜?

그러겜. 맛있는 것도 이제 못만드는 것 같다겜. 어쩌지?

우리 아이들의 먹이로 줘버리자겜! 이녀석이 그동안 아이들을 먹어왔으니 이제 아이들이 이녀석의 몸을 침으로 녹여버려도 불평은 할 수 없을 거다겜.

그런데 이녀석 너무 뚱뚱해져서 우리만으로는 못 데려가지 않을까겜? 다른 친구들을 불러와야겠다겜.

죽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않는 갈색으로 변한 통통한 애벌레를 보고 일겜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다 굴의 저편으로 가버렸습니다.

불쌍한 애벌레... 그렇게 봄을 그리워하고 바깥 세상을 그리워 했는데 이렇게 됬구나겜.

일겜이들이 사라지자 한 구석에 숨어있다 나온 숫겜이 1호는 한숨을 쉬며 변해버린 애벌레를 보았습니다.

그래겜. 이렇게 애벌레가 녹아서 음식이 되게 할 수는 없다겜.

숫겜이 1호는 크게 결심을 하고 자신만이 아는 굴의 비밀통로로 열심히 통통하고 딱딱하게 굳은 애벌레의 갈색 몸을 머리고 밀고 몸으로 밀고 다리로 굴려서 옮겼습니다. 비뚤비뚤 오르고 내리고 휜 길을 한참을 낑낑 고생해서 애벌레를 옮기고 마침내 뽕! 하고 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을 밀어서 벌리고 넓혀서야 애벌레의 갈색 몸과 숫겜이 1호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연한초록 빛이 가득했고 노랗고 붉게 핀 꽃들과 연분홍으로 흩어지는 꽃잎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아! 눈이 부시다겜!

생전 처음으로 굴 밖으로 나온 숫겜이 1호는 한순간 화사한 봄날의 햇살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애벌레의 굳어버린 몸을 바닥에 두고 눈을 차단한 채로 햇살을 온몸으로 맞았습니다.

이게 애벌레가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하던 바깥 세상인가겜. 이제 나도 동굴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나쁘지 않다겜.

숫개미 1호는 조금씩 햇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세상을 보며 낮고 굵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부스럭부스럭 흔들흔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리냐겜? 봄의 소리냐겜?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숫겜이 1호가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죽은 것처럼 굳어있던 애벌레의 갈색몸이 뿌직뿌지직 금이 가고 찢어지더니 그 안에서 까만빛이 도는 파란빛의 커다란 날개가 튀어나왔습니다.

하하하하! 바깥이에요! 봄이에요!

파란날개의 벌레는 아직 축축한 파란 날개를 활짝 펴서 햇빛에 말리며 소리 높여 웃었습니다.

애벌레니겜?

숫겜이 1호는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파란날개의 벌레는 천천히 커다란 날개를 접었다 펴더니 이내 하늘로 팔랑 날아올랐습니다.

이제는 나비에요. 하하하하! 같이 날아요! 저 하늘로! 봄 속으로!

나비는 연분홍 꽃잎이 분분 섞인 봄바람을 타고 팔랑팔랑 날아올랐습니다. 그 모습이 파란 하늘에 묻히려는 걸 보고 숫겜이 1호도 그동안 겜이굴에서 살며 한번도 펴지 않았던 길고 투명한 날개를 펼쳤습니다.

같이 날아가자겜! 내일이 없더라도 겜겜!

파르르 떨리는 날갯짓소리와 함께 작은 까만점도 눈부신 햇살 속으로 솟구치고 사라졌습니다. 세상에는 노랗고 빨갛고 파란 꽃들이 흩어졌고 작은 나비 한 마리와 숫겜이는 봄이 되어버렸습니다.